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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외과의ㅛㅏ Jan 28. 2022

장기 입원 환자들에게 생기는 양가감정.

전공의 일기

주치의를 하면서 가장 버거운 순간 중 하나는 본인 이름이 걸려있는 환자 수가 많을 때다.

과에 따라 다르겠지만 담당 환자가 10명대이면 얼굴도 기억하고 과거력이나 자가약 등을 꽤 상세히 기억할 수 있다. 20~30명이 넘어가면 이름과 얼굴은 기억한다. 하지만 항생제나 식이 진행 등 중요한 사항들을 제외하곤 차트를 다시 찾아봐야 기억이 난다. 40~50명의 환자에게 내 이름이 걸려있으면 프리 회진(교수님과 회진 돌기 전 혼자서 미리 도는 회진)은 뛰면서 돌아야 한다. 동의서를 받을 땐 거의 랩을 하는 수준이다. 환자들의 이름과 얼굴이 매치가 안 될 때도 있다. 따라서 환자들의 입원 기간은 주치의의 업무량과 비례한다.

입원 후 환자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꼼꼼히 환자를 보고 정해진 날짜에 퇴원을 시키는 것이 베스트이다. 예정된 수술을 하고, 루틴대로 식이 진행을 하고, 상처가 회복되어 나가는 단기 입원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환자분들께는 고마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병원은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공간이다. 갑자기 구토를 하고, 심박수가 빨라지거나, 호흡이 힘들어지는 환자들이 생긴다. 이럴 때면 오히려 내가 숨이 차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상황들은 환자들을 장기 입원으로 가게 만든다. 장기 입원 환자들은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통 오래 입원하게 되면 하루하루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병원이란 공간은 환자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라 균의 사람 간 전파가 더욱더 쉽다. 정상인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균이더라도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에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환자복을 오래 입을수록 본인이 환자라는 프레임으로 컨디션 호전이 쉽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장기 입원 환자들의 장점도 있다. 우선 이름과 나이, 얼굴은 확실히 기억한다. 매일 얼굴을 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정도 쌓인다. 이번 파견 기간엔 28일 중 26일 동안 매일 얼굴을 본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는 이제 뒷모습만 봐도 내 환자인 걸 안다. 잘 알고 신경을 오래 쓰다 보니 처방도 제일 먼저 내는 환자이다. 빠뜨리는 것 없이 챙기려고 한다. 빨리 회복시켜서 퇴원시켜드리는 게 목표였지만 막상 퇴원하시는 내일은 좀 아쉬울 것 같다. 아쉽지만 ‘또 봬요’라는 말은 암묵적인 금기어이다.

환자분들도 느끼실 것이다. 단순히 퇴원을 빨리 시키려는 주치의인지, 본인을 신경 써주는 주치의인지 매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으실 것이다. 회복을 잘해주시는 단기 입원 환자분들에게 너무나 감사하지만, 오래 계시는 장기 입원 환자들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사실이다. 빨리 퇴원을 바라면서도 막상 퇴원 날에 인사도 못한 날은 왜 이렇게 빨리 집가신다고 생각되는 건지..

“잘 회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항상 인사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다. 처음엔 예의상의 멘트인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였다. 환자복을 벗고 일상복 차림으로 퇴원하시는 뒷모습이 그렇게나 고마울 수가 없다. 한달 한달 지날수록 느끼는 것이 다양해지는 1년 차 말, 그리고 창원 파견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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