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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외과의ㅛㅏ Feb 12. 2022

퇴근을 제 때 하지 못하는 이유들.

당연한 오버타임

전공의 근무시간은 한주에 88시간으로 규정되어있다. 일주일은 168시간이니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는 것이다. 88시간이 잘 지켜지면 남은 80시간은 병원이 아닌 공간에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88시간만 일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퇴근 시간이 되었으니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퇴근해야겠다.'라는 개념은 병원에서 잘 통용되지 않는다.




1. 일과 시간 중에 상태가 안 좋은 환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날 입원하는 신환 처방은 낼 겨를이 없다. 보통 입원하는 환자들은 걸어 들어오고, 지금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누워있다. 상대적으로 신환이 더 건강할 것이다. 이런 가정 하에 신환 처방은 후 순위로 밀린다. 그리고 상황이 좀 안정되고 돌아보면 벌써 퇴근시간 언저리이다. 그때부터 신환 처방을 내야 한다. 늦었으니까 신환 처방을 내일 내겠다고 퇴근해버리면, 환자는 병원이 아니라 숙박시설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처방을 내다보면 퇴근시간은 훌쩍 지나버린다.


2. 보통 첫 수술 환자는 아침 8시부터 수술실로 내려간다. 첫 수술부터 마지막 수술까지 수술방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많은 환자들이 수술실 입구를 드나들고 나면 오후 4시쯤부터는 수술방이 하나둘씩 닫히기 시작한다. 오후 6시가 되면 그 큰 수술실에 3-4명 정도가 남아 마지막 수술이 진행된다. 그렇게 주치의는 마지막 수술을 기다리며 수술 후 내야 할 처방을 기다린다. 그리고 수술 후에 나올 교수님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수술이 늦게 끝난 날엔 주치의들을 찾지 않으신다. 하지만 교수님과의 회진을 돌아야 다음날 환자 플랜이 세워진다. 차라리 늦게 퇴근하고, 다음날 플랜을 세운 채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훨씬 좋다. 교수님 수술이 늦게 끝나면 내 일이 빨리 끝나더라도 그렇게 같이 늦게 퇴근하는 것이다. 혼자만 늦는 건 아니니 별로 억울한 느낌은 아니다.


3. 외과 내에는 많은 파트가 있다. 이식, 간담췌, 유방, 혈관, 소아 등등 대충 세려 봐도 10개가 넘는 것 같다. 3년 동안 수련하면서 이 세부 파트들을 모두 돌려면 여러 번 파트를 옮겨 다녀야 한다. 본원은 4주마다 한 번씩 파트를 옮긴다. 새로운 파트에, 새로운 교수님들에 조금 적응되었다 싶으면 다음 파트 인계장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파트 동기에게 환자 인계를 받고, 또 인계를 해준다. 근무 시간 내에 인계를 해주기엔 너무나 여유가 없다. 그렇게 또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한다.




이외에도 갑자기 생긴 응급 수술, 퇴근 시간에 맞춰 열이 나기 시작하는 환자 등 정시 퇴근을 못할 수 있는 상황들은 상당히 많다. 모두 합당한 이유들이어서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큰 불만은 없다. 다만 아쉬울 때는 가끔 있다. 퇴근 후 계획했던 러닝을 못하거나,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해야 할 때면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보니 아쉽고 씁쓸한 감정이 곧 ‘불만’ 이려나. 머리론 불만이 없다곤 하지만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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