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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베리 Sep 23. 2024

22개월 아기와 하노이에서의 마라톤

[육아해우소 (42)]


#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 하루


무슨 생각이고 자신감이었을까.

성취에 목마른 날이었을 거다.

두 달 전 참가신청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것은 마라톤 5km.


십여 년 전 슈퍼맨이 돌아왔다 삼둥이편에서 송일국배우가 삼둥이를 유모차에 태운채 마라톤을 하는 장면이 항상 내 머릿속에 있었다.


내 여동생이 마라톤을 꾸준히 참가할 때마다

’ 하빈이랑 남편이랑 같이 참가하면 참 좋겠다 ‘

생각하길 여러 번.

장난스럽게 남편에게

“하빈이 유모차태우고 남편이 끌면서 뛰고 다 같이 마라톤 어때?”라고 몇 번 말했다.

그때마다 남편의 단골멘트 “좋지!!”

참가신청을 하고 남편에게 말했을 때도 “좋지!!”란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남편은 일상이 운동인 사람이고 지금은 바빠서 옛날처럼 운동을 많이 못할 뿐이다.

나랑은 비교할 수 없는 체력이다.

나는 출산 후 약 1년 동안 꾸준히 운동하고 있는 헬린이.

주 4회 헬스를 하고 오면 힘들다는 핑계로 달리기 연습도 하지 못한 채 두 달이 흘렀다.

마라톤 일정이 잡혀있던 주에 하노이에 큰 태풍이 지나가는 바람에 일주일 연기된 마라톤.


마라톤 전날 밤,

짐을 챙기고 다음날이 걱정되어 깨기를 몇 번.

새벽 4시 반에 셋다 기상하여 준비를 하고 1층에 내려갔는데 비가 엄청 쏟아지는 것이었다.

바로 다시 올라가 유모차 방풍커버를 챙겼다.

한 시간 거리의 마라톤 스타트지점으로 가는데 비가 그칠 생각 없이 내렸고 도로가 잠긴 곳도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와중에 풀코스와 하프코스를 뛰는 참가자들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이대로 비가 쏟아진다면 포기를 해야 하나 남편과 이야기하던 중 차에서 내리는데 거짓말같이 비가 잦아들었다.

내리자마자 하빈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방풍커버를 장착했다.

답답해할까 봐 걱정했는데 조용히 잘 앉아있는 하빈이에게 고마운 마음은 어떻게 표현이 안되었다.


스타트라인으로 가서 정신없이 배번호를 옷에 다는 순간 진짜 실전이구나 싶었다.

하빈이는 많은 사람들과 시끄러운 행사소리에 어리둥절하며 구경 중이었다.


5km를 내가 뛸 수 있을까 걱정을 안고 시작된 마라톤. 옆에 페이스메이커 남편이 없었다면 완주 못했을 거라 백 프로 확신한다.

그리고 남편이 끌고 있는 유모차에 하빈이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뛰는 도중 호흡법이 익숙하지 않아

옆구리가 아프기도 했고

걷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고

계속 남편에게 천천히~ 천천히~ 같이 가! 를 외치며 징징대기도 했다.

그런데 남편은 싫은 소리 한 번도 없이 이렇게 하면 돼. 저렇게 하면 돼. 잘하고 있어. 응원해 주었다.


아기가 유모차에 타고 있어 참가자들은 뛰면서 다 한 번씩 보고 격려를 하며 지나갔다.

그것 역시 힘이 됐다.


마지막에 남편이 피니쉬라인이 얼마 안 남았다고 전속력으로 달려보라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힘을 짜내서 뛰었는데 사실 피니쉬라인이 아니었다. 200m 정도 더 남았었는데 힘이 빠진 내 손을 남편이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손을 맞잡고 골인했다.

전속력을 다해 마지막에 뛰어서 멈추자마자 어지러웠는데 남편은 또 옆에서 어지러울 거라고 천천히 잡고 들어가라고 괜찮다고 말했다.


5km가 누군가에겐 짧은 거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엄청 긴 거리일 수 있다.

돌아보니 우리가 10년 넘게 같이 해오면서 남편은 항상 내 옆에서 마라톤 뛸 때처럼 해 줬던 것이었다.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순간.


1시간이 컷오프타임이었는데 39분을 몇 초 남겨두고 들어온 우리 셋.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용히 앉아서 비구경, 사람구경을 하며 즐겼던 하빈이.

하빈이가 탄 유모차도 끌고 천천히 내 페이스까지 맞췄던 남편.

남편은 혼자 뛰었으면 5km는 아마 20분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물어보진 않았다;)


두 남자랑 함께 내 버킷리스트를 하나 이루었다.

돌아가는 택시 안,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이제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남편은 훗 하며 웃었다.


간만의 성취감에 행복했던 하루.

마라톤 뛰는 동안에도 비가 오락가락하여 젖었던 우리.

끝나고 택시를 타러 가는 길. 장대비가 쏟아졌다.

홀딱 젖었지만 재밌고 색다른 하루였다.


이 고마운 마음을 두 남자에게 돌린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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