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마라톤을

by H Jung

최대한 익숙한 것만 익숙한 방식대로 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자꾸 틈을 허락하는 <달리기>. 오늘 처음으로 5km를 쉬지 않고 달려봤다. 2025 Tay Ho Half Marathon. 단거리는 이 악물고 뛰었지만 장거리는 그저 피맛 나는 것, 꼴등 아니면 다행인 것이었는데 엄청난 변화다. 무려 마라톤이라니. 그러고 보니 열두 살 즈음 친구가 햄 받으러 가자길래 롯데 주최 마라톤 대회를 나간 적이 있었다. 어린이 다섯 명이서 뛰기만 했을 뿐인데 햄을 받았다며 네모난 통햄이 무거워도 좋다고 히죽 거리며 잠실부터 지하철 타고 강 건너 집까지 돌아왔었지. 오늘 뛰는 중에 '와 인생 첫 마라톤인가?' 하며 과거를 더듬다가 20여 년 만에 떠오른 기억이었다.


어제 대회 전날엔 티셔츠 및 협찬사 광고제품들이 들어있는 가방을 받아오고, 저녁이 되어서야 준비할 것들을 찾아보았다. '처음이다 보니 가방을 들고 가야 하나? 물은 알아서 챙겨가는 건가? 몇 분 전에 가야 하나?' 등 세세한 궁금증들이 산발적으로 마구 튀어 올랐는데 그냥 에어팟/휴대폰만 힙색에 넣어 몸만 가기로 했다. 예전엔 세세하게 다 찾아보고 대비했는데 <그냥 Go> 해버렸네. 이게 나이가 들어서 귀찮아진 건지 아니면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둘다겠지? 다만 개인적으로는 어떤 성향이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기보다 흐릿해지는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 조금 더 유연하고, 수용가능한 폭이 넓어지고, 둥그러지고 싶은 마음. 그리고 사실 복잡스러울 땐 그냥 간단히가 최고인 걸로.


일요일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악명 높은 하노이 공기건만 웬일인지 대기상태도 너무 좋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후원사가 배포한 초록티를 입고 한 자리에 모였다. 아무래도 가장 짧은 구간이다 보니 어린이 포함 가족단위가 많았고, 이 시간을 이용해 자기 사업체의 홍보 피켓을 들고뛰는 사람, 친구들과 우르르 온 사람, 꾸리꾸리한 암내가 전해지는 사람, 무릎 테이핑 기본, 시계, 조끼 등 멋진 기어를 장착한 사람, 국기가 프린트된 외국인 등 다양히도 밀도 높게 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선을 강탈한 건 하얀 크록스 쪼리 슬리퍼를 신은 여성이었다. 심지어 후원사가 전날 나눠 준 끈가방도 매고 있었다. 나는 부상방지를 핑계로 요란스럽게 몸을 풀다가 옆에 있던 남편의 옆구리를 콕 찔러 '저것 좀 봐' 했다. 아침에 '이 운동화를 신을까? 아냐 저 운동화가 지난번에 더 편했어' 라며 신발을 골라 신었고, 모인 사람들의 발을 보며 '우웅 나도 HOKA... 나도 ON' 하고 있던 나였으니... 근데 크록스라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계속 내 앞에서 달렸다. 재빨랐다. 가벼웠다. 재야의 고수였던 것이다! (내 기준) 안 그래도 최근에 다 낡아빠진 러닝화를 신고 달린 아흔 살 넘은 러너도 뉴스에서 봤었는데. 역시 장비 탓은 목구멍에도 올리면 안 되는 것이다. 그저 그것은 욕망인 것이세요.


TayHo (떠이호:서호:west lake)를 옆에 끼고돌며 평소에 그랩택시를 타고 다녔던 그 길을 내 발로 직접 뛰었다. 아 좋아. 때때로 로컬 레스토랑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 쓰레기 냄새, 호수에서 올라오는 물비린내도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좋았다. 기록은 전혀 중요치 않다며 내 옆에서 같이 뛰겠다던 남편이 흰 모자를 쓴 뒤통수를 보이며 저 멀리 앞서 갔지만 열받지 않았다. 사실 좀 어이는 없었지. '쟤 뭐야? 왜 저래?' 멀어져 가던 흰 모자.. 그것도 저거 내 모자잖아.. 남편이란 사람들은 왜 그럴까? 아 아니다. 옆길로 새지말자.


그새 눈에 익은 사람들과 함께 고만고만하게 엎치락뒤치락하며 뛰었다. 즐겁고도 괴로운 가운데 사람들에게 나름의 별명도 정했다. 초록티+핑크바지 언니는 수박언니, 종아리 한가운데 타투를 한 아저씨는 알고 보니 점이길래 점땡 아저씨, 넓은 골반 대비 잘록한 허리가 인상적이었던 화사언니, 회색티에 헤드폰 낀 미군(느낌 나던)아저씨는 뛰다 걷다를 반복했는데 걸을 때마다 내가 앞질러서 홀로 또 그 순간을 두어 번 즐겼다. 그리고 통제된 거리를 뛰는 묘한 쾌감이 있더라. 이쯤 되니 혼자 너무 잘 노는 변태 같구먼.


점점 벅차오르는 숨, 느려지는 발. 평소 3km만 뛰었기에, 지금 얼마나 뛰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남았는지 몇 초대로 뛰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보는 순간 느껴질 실망감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뛰었다. 촘촘히 뛰기도 하고, 발을 지면에 더 강하게 디뎌 보폭을 넓게 뛰기도 하고, 힘들수록 뛰는 사실에 더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너무 힘들 땐 '저기 보이는 저 건물까지만 뛰고 간판 기억해야지. 그리고 얼마큼 안 쉬고 뛴 건지 나중에 지도로 확인해야지' 했는데 또 그러다 보니 골인 지점이 가까워져 버렸고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참고 뛰다 보니 "골인지점까지 300m" 표시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앞에 아까 그 수박언니가 보였다. 으랏차차! 그래 수박언니만 제쳐보자. 뛰어어엇! 그렇게 몇 명을 제치고 나니 골인지점에 서 있는 흰 모자 쓴 익숙한 그 얼굴이 보인다.


'야! 거기! 남편!!!' 실제 외칠 힘은 없음. 그는 고개를 숙이고 폰만 보고 있다. 골인 지점에 가까이 돼서야 "야아아앗!" 하며 이름 석자를 외치니 그제야 고개와 폰을 동시에 들었는데 아마 중요 순간은 놓쳤을 테고 그 사이 나는 골인!!! "예에에에에- 완주다 완주!!!!"


남편은 나한테 막 달려오더니 내 사진 못 남겼다며 아쉬움을 쏟아낸다. "조용히 해. 헉헉. 토할 것 같으니까 쉿! 헉헉." 인생 처음으로 쉬지 않고 뛰며 마지막 스퍼트 내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은 쉬지 않고 아쉬워한다. "아 사진 못 찍었어. 아아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생각보다 빨리 온 거야!" "아니 헉헉. 조용히 헉헉. 쉿! 헉헉" 진짜 그가 하는 말이 내 입에서 토로 나올 것 같은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조금 더 걷다가 완주 기념 메달을 받으며 되찾은 안정.


행사장에서 요리조리 사진을 남기고 돌아오는 거리에 작은 의자에 앉아 쌀국수 먹는 초록티 참가자들이 부러웠지만, 집에 전날 해둔 음식도 많고, 자고 있을 아이를 깨워 예배를 가야 하기에 집으로 향했다. 예배드리고 집에 오니 아직도 오전 11시. 하루가 정말 빡빡하게 뿌듯해져 버렸다.


그리고 사실 남편은 뛰고 나서 신나서 바로 너무 뿌듯하고 기쁘다고 했다. 나는 '와 해냈다.' 정도?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뭘지, 내가 둔한 사람인가? 행복의 역치가 높나? 싶었는데 늦은 오후가 돼서야 깨달았다. 오늘 15km, 21km 뛴 사람들이 있으니 내껀 별거 아니라고 비교와 은근한 평가절하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덜 기뻤고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곰곰이 하루를 남기면서 몰랐던 내 마음을 알아차린 이제야 정말 뿌듯하다. 지나면 잊혔을 풍경들과, 달린 뒤 느낀 감정까지 곱씹고 보니 나의 하루가 더 이해되고 뿌듯하다. 기쁘다. 달렸을 뿐인데 얻을 수 있는 게 참 많다. 러닝도 깨달음도 조금 느리지만 좋아. 너무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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