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치 에너지가 순식간에 바닥난 5시간.
최근 한 스페인 산악가가 500일 동안 70m 지하동굴에서 살다 나왔다는 외신 뉴스를 봤다.
"플라미니는 라이트가 달린 헬멧과 책, 종이와 연필, 뜨개질 도구를 가지고 동굴에서 지냈다. 연구팀은 플라미니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했고, 식재료를 배달했으나 특별한 소통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비상 버튼’이 있었으나 누르지 않고 미리 약속한 500일을 채웠다." (1)
극한의 고립과 단절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녀는 무슨 힘으로 버텼을까.
신기하고 대단한 그녀가 부러울 지경이었던 하루였다.
오며 가며 마주칠 때 짧은 이야기만 나누던 그녀들과 벼르던 공식 데이트 날이었다. 아침 9시부터 Z과 L를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오마갓. 만나고 나서 30분 만에 남편에게 SOS 톡을 보냈다. '살려줘.. 집에 가고 싶어.'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 아니 귀에 단어들이 꽂힌다. 그녀들은 엄청난 달변가였던 것이다. 오디오가 빌 틈이 없는 예능에서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만난 사람들 같았다. 어느 한 명의 말에 마침표가 끊기기도 전에 다른 한 명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이야기가 끝날새라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다. 살벌한 속도로 오가는 화제들과 격한 반응에서 청각과민증 내향인은 사라지고 싶어졌다.
오디오가 겹쳐... 겹친다고... 겹/겹/이 겹친다고(!!!) 마치 이날을 위해 쌓아놓은 듯, 모든 정보를 다 쏟아내던 그녀들. 학교, 학부모, 동네, 연예인, 부동산 이야기. 와 어쩜 그렇게 아는 것도 많고 심지어 기억도 잘하는 건지! 그야말로 대단한 정보혈전이었다. 무거운 프레스가 숨통을 짓누르는 듯, 탈곡기에 알곡이 털리듯 영혼이 털린다. 와 제일 견디기 힘든 건 가끔 맞장구친답시고 헛소리를 하는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정신을 붙들어 매야 했다.
반주를 하고 싶어하던 Z였지만 시간 여건상 허락되지 않았고, 알콜분해효소가 일반인 대비 한참 모자란 나는 속으로 혼자 다행이다를 외치며 한편으로는 또 술까지 못 마시는 내가 싫은 마음도 한겹 쌓였다.
다양한 결의 사람들이 만나 풍부한 만남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만 요즘은 왠지 외로운 마음이 드는 때였다. 나랑 비슷한 사람, 든든한 지지로 서로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기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진짜 내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고팠는데, 사건만 있는 대화가 견디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래도 그 빠른 스피드가 정말 버거웠다. 집에 와서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누워있다가 한 3시간 뒤에서야 겨우 정신이 좀 들었고, 저녁을 먹고 너무 졸려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겨우 8시. 확실히 기가 빨리긴 빨렸나 보다. 그녀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과연 내 마음속 거리감을 좁힐 수 있을까?
사실 내가 진짜 아예 찐 내향인이라면 그런 인연이 고프지도 않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정말 잘 놀 수 있을 테지. 아마도 외향성을 가진 내향인이라 그런 걸까? 그렇다면 종종 느껴지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그냥 디폴트로 두고 살아야 할까? 비단 내/외향만의 이슈는 아니겠지만 외로움을 덜어내고자 내 시간, 에너지, 돈을 들여서까지 이렇게 살 일은 아닌 듯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녀들이 싫다거나 이상한 건 절대 아니다. 나와 참 다른 것이다.)
500일 동안 동굴에 있던 그녀가 될 수는 없겠다만 일단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나가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의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소통의 욕구, 연결의 욕구, 소속의 욕구를 내향인들이 '특히 외국에서' 해소하는 방법들이 궁금하도다.
일단 짐에겐 인터넷과, 쓸 수 있는 노트북 한대가 있소이다.
(1) 한겨례신문 4월 17일 자 뉴스 '70m 지하동굴서 500일 지낸 50살 여성, 웃으며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