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장시킨 책
1. 올해는 유난히 죽음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엄마의 죽음 후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딸의 이야기 'H마트에서 울다', 신경외과 의사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마주하기 전 2년의 시간을 써 내려간 '숨결이 바람 될 때', 형의 암투병과 죽음을 겪은 후 미술관 경비원이 돼 10년을 보낸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삶과 죽음에 대한 시선을 담은 빅터 프랭크의 자전적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생의 마지막 챕터를 살아가고 있는 1,000여 명의 노인들을 인터뷰해 엮은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까지. 모두 이별과 죽음을 다룬 책들이었지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한 책 한 책 그 여운이 책을 끝내고도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곤 했는데, 그렇게 5-6개월에 걸쳐 마지막 책을 읽었을 때쯤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삶은 영원하지 않다. 그리고 그 끝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가올 수 있다.’
2. 나는 언제나 내 삶에 열심이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나를 볶아 채며 살았다. 내 삶의 무게 추는 현재보다 미래에 있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룬 순간들도 많았다. 내게 미래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먼 훗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무언가였다. 그러나 죽음으로 인해 그 미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는 거의 하지 못했다.
3. 내가 읽었던 책들에서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찾아왔다. 책을 쓴 저자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옆에 있던 동료에게도,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죽음에 어떤 인과관계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건강하던 사람에게도, 젊은 사람에게도 죽음은 기어코 왔다. 우리 삶에는 '끝'이 있었다.
4. 인생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한 후, 나는 지금의 삶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그것은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할 어떤 '대상'으로 여길 때와는 확실히 다른 관점이었다. 미래를 위해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삶과 내가 분리가 됐지만, 삶이 소중하다고 느낀 순간 삶과 나를 따로 떼서 볼 수 없게 됐다. 내가 삶이고, 삶이 나처럼 느껴졌다.
5. 이 소중한 삶을 꽉 끌어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을 산다'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미래를 좇느냐 매일 수확하지 않아 잃어버렸을 기쁨과 즐거움, 아름다움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후회했다. 중요한 것은 내일이 아닌 오늘이었다. 하루하루가,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리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 지금 이 순간을 붙잡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죽음에 관한 책들이 내게 준 커다란 깨달음이고 선물이었다.
6. 나에게 주어진 날들을 헤아리기 시작한 후 달라진 변화들이 몇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미루지 않는 것.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같은 말은 해야 하는 순간에 바로 전하려 노력한다. 다음에 밥 먹자 대신 만날 날을 잡는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 꼭 경험해 본다. 그리고 절대 운동을 미루지 않는다. 예전에는 회사 일이 많으면 운동을 포기하고 야근을 했지만, 지금은 운동 끝나고 집에서 일을 더 하는 한이 있어도 오늘 해야 하는 운동은 빼먹지 않으려 애쓴다.
7. 인생의 우선순위를 치열하게 따진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적이라면, 더 가치 있는 것에 시간을 쓰는 게 당연하다. 이전에는 그냥 했을 법한 일들을 이제는 이유 없이 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내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결정한다. '가차 없는 우선순위화' 내겐 그게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나를 탐구하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나에 대해 내가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았구나 놀라는 한편, 나와 내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친해질수록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던 이 마음이 채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8. 없는 것보다 있는 것에 집중한다. 가지지 못한 것들보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 부족한 것을 채우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보다, 내가 가진 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벼리는 시간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음을 알게 됐다. 이는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진 덕분에 깨닫게 된 앎이었다.
9. 마지막으로, 세상에 나만이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족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며 배우고, 혼자서는 이뤄내지 못했을 성취들을 함께 만들어가는 지금의 직장 생활도 너무 좋다. 하지만 나의 재능을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은 그게 무엇일지 답을 찾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시간들은 그 소명을 찾고 이루는 데 쓰고 싶다.
10. 2007년에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와 화제가 됐던 대기업 신입사원의 사직서가 있었다. "저는 10년 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오늘의 행복이라고 믿기에, 현재는 중요한 시간이 아니라 유일한 순간이라고 믿기에, 이 회사를 떠나고자 합니다." 이름 모를 이 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성에 대해 일찍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지 않을지도 모를 10년 뒤를 기약하며 '다음에, 나중에'를 외치지 말자. 지금 내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