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이야기] ‘맛존땡’ 대전 여행

그들은 다 계획이 있었다

by 길위의스튜디오

2025년 4월 19일. <길 위의 스튜디오>는 22명의 발달장애 청년들과 첫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름하여 ‘단짝투어’. 내 친구와 함께, 내가 선택한 여행지로, 내가 준비하여 떠나는 여행이다. 참가자 개인의 자기주도적 선택을 존중하고, 여행의 모든 순간을 스스로 해결하며 우정을 쌓아가기 위해서는 대그룹보다 소그룹 운영이 적합했다.

참가자들의 욕구와 성향을 고려하여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보니 평일에는 수업 시간을 맞추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세 그룹이 두 시간씩 순차적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평일에 열심히 일 하고 주말에는 친구와 만나 여행을 떠나는 삶. 상상만으로도 근사한 미래를 그리며, ‘단짝투어’가 시작되었다.

여행지를 조사하고, 함께 논의하고, 일정과 예산을 계획하는 등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 첫 번째로 여행을 떠난 날은 5월 31일이었다. 세 그룹 중 가장 부지런히 모이는 오전 10시 그룹이 여행도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참가자들이 선택한 여행지는 대전. 흔히 ‘노잼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지만 성심당을 앞세운 ‘빵지순례’가 유행하며 떠오른 도시다.

그리고 이때까진 아직 몰랐으나 10시 그룹은 모두가 음식에 진심인 참가자들이었다. 이 그룹의 먹방투어는 몇 달 뒤 홋카이도 여행에서 진가를 드러내게 되는데, 대전 여행은 그 애피타이저였다.


8시 30분, 서울역에서 KTX 청룡을 타고 대전역에 도착했다. 첫 번째 일정은 ‘밀가루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대전의 대표 맛집, 신도칼국수.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일정이다.

나야 아침을 거르고 왔으니 괜찮았지만 아침식사를 하고 온 참가자들에게 오전 10시 아점은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으나 웬걸. 들어서자마자 역사가 있는 칼국수 집이라고 공부한 바를 뽐내며 감탄을 하더니 음식이 나오자마자 흔한 인증샷 하나 찍지 않고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더니 다음번에는 옆 테이블에서 먹던 두루치기를 먹자고 한다. 먹으면서 다음 먹거리를 고민하는 게 범상치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잔뜩 신이 난 이들과 식당을 나섰다. 한 참가자는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한테도 추천하겠다며 ‘맛존땡!’을 외쳤다. 살짝 삐끗한 유행어지만 뭐 어떤가. 의미도 통하고 훨씬 귀여운데.


대전은 ‘맛존땡’의 도시였다. 신도칼국수 다음 목적지는 대전의 명소, 성심당이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그래서, 성심당까지는 걷기로 했단다. 걸어가면 소화가 되니까.

그렇다. 그들은 다 계획이 있었다.


먹고 걷고 먹고 걷고, 걷고 먹고 걷고 먹고.

이들은 성심당에서 각자 먹고 싶은 빵을 사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테미오래를 들렀다가 소제동 카페거리에 에이드도 한 잔씩 마시고, 저녁으로 카레 돈가스를 먹고, 대동 하늘공원을 걸어 올라가 야경을 보고, 마지막으로 대전역 성심당에서 가족들에게 선물할 빵을 한 상자씩 사서 서울로 올라갔다.

먹기도 잘 먹지만, 먹을 때마다 음식 맛에 대한 깊은 찬사와 평가를 하는 모습이 진정한 ‘맛잘알’들이었다.


그리고 밥심 덕인지 걷기도 참 잘 걸었다. 하루 종일 2만 보는 족히 걸었는데, 야경을 보겠다며 대동 하늘공원까지 올라갈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굳이 여길 가야 하나’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경사도 심하고, 솔직히 대전의 야경이 그다지 크게 기대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본인들이 결정한 곳에서 야경을 봐야 한다는 의지가 매우 높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앞장서 걸어가는 뒷모습들이 아주 힘찼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고 참가자들의 반응을 보았을 땐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참가자들은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아~ 좋다’라며 저 단전 아래에서 나온 진심 어린 감탄을 뱉었다.

일몰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나를 찡하게 만들었다.


사실 대전은 성심당을 제외하면 볼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옛 관사를 개조해 다양한 문화, 전시가 있는 테미오래는 기대 이상으로 예뻐 추천할 만 하지만 나머지는 문을 닫은 가게가 많고 아주 한산했다.

그렇지만 스스로 선택한 여행지에 대해 참가자들의 만족도는 최고였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서로 칭찬하는 모습이, <길 위의 스튜디오>를 시작한 보람을 200% 느끼게 했다.


여행 취향이 잘 맞는 것도 참가자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요소였다. 가족, 연인, 절친 사이에도 여행을 가서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만큼 여행은 취향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그룹은 기가 막힐 정도로 취향이 잘 맞았다. 오래 걸어도 끄떡없는 체력과 가리는 것 없는 입맛, 남기는 것 없는 위장,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리액션까지. 함께여서 더 좋은 시너지가 나는 그룹이었다.

물론 참가자들끼리 너무 잘 맞아서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우리는 대전에서 기차, 버스, 지하철, 도보, 택시까지 모든 교통수단을 섭렵했다. 대중교통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힘든 점도 있지만 공부도 되고, 또 워낙 기차나 지하철을 좋아하는 참가자들이 많아서 만족도가 높다. 대전 지하철을 탔을 때 다들 어찌나 행복해하던지……. 대전 지하철은 안내음 소리가 다르다며 신이 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래서 대부분 이동방법의 1순위로는 대중교통이나 도보를 택하지만 성심당에서 테미오래를 갈 때는 경로나 비용 면에서 대중교통보다 택시가 나았다. 택시가 필요할 땐 앱으로 택시를 부르는 법도 배우고, 더치페이로 금액을 나누는 것도 배운다.

배운 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은 참가자들은 너도나도 앞장서 택시를 불렀다. 그런데 택시가 도착하자 동행지도 교사들은 내버려 둔 채 4명의 친구가 먼저 택시를 타고 쌩 떠나버렸다. 헐…… 이렇게 버려지나?

당황스럽지만 귀엽기도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비슷한 일이 생긴다.


참가자들은 우리에게 늘 좋아한다고 말해주지만 막상 그룹을 나눌 일이 생기면 우리를 내팽개치고 친구들을 선택한다. 우리 빼고 모두가 한 그룹을 만들기도 한다. 혹시 삐쳤냐며 기분을 살피기도 하지만 절대 친구들 대신 교사들과 함께 하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농담으로 서운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보다 또래친구를 선호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도리어 긍정적인 신호로 생각한다. 교사나 부모가 채워줄 수 있는 것과 또래친구가 채워줄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단짝투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참가자들끼리 자조모임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어떻게든 해보려는 태도는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렇게 여행을 통해 한 발 더 가까워진 참가자들은 대전역 성심당에서 가족들 선물까지 야무지게 챙겨 기차를 탔다.

배도 풍족하고 마음도 풍족했던 <길 위의 스튜디오> 첫 여행, 끝!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참가자 후기] 코로나로 빼앗긴 졸업여행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