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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꽃언니 Oct 15. 2021

우리 동네 한 오래된 의원

엄마는 요즘 안 오시네

우리 동네에는 정말 오래된 의원이 있다. 아마도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부터동네 어르신들을 상대로 진료를 보던 작은 의원일 것이다. 창문에 ○○의원이라 표시한 초록색 스티커가 얼마나 헤졌는지 굳이 병원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연식을 짐작할 수 있다.


○○의원은 소아과 내과 이비인후과 진료를 다 보지만 변변한 진료시설은 없다. 목구멍을 들여다보는 그 흔한 스크린마저도 말이다. 대부분 증상을 참작해서 진단이 나오고 그에 맞게 처방도 내려진다.


이렇게 얘기하면 뭐 이런 돌팔이 같은 의원이 다 있냐고 하겠지만 근처에 신식 병원이 많이 생겨났음에도 우리 가족은 그 병원의 단골손님으로 십몇 년째 왕래하고 있다. 딱히 어디가 정확히 아픈지 모르겠는데 여기도 저기도 다 아픈 것 같을 때를 다루는 의사 선생님 내공 때문이다. 애매하게 아플 때 어느 진료과를 가야 할지 모르면 ○○의원에 가면 된다. 개떡같이 설명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고 약을 잘 써주신다. 잘 낫는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 멍하고 위가 계속 쓰렸다. 식은땀이 나고 두통도 심한데 콧물도 나기에 나는 오늘 의원을 찾았다. 수액을 한병 맞고 엉덩이 주사도 한대 맞고 하려고 말이다. 프런트에서 후덕한 체구의 간호사 아줌마가 반갑게 맞는다.


"오랜만에 오셨네. 아픈데 없으니 안 왔을 테니까 좋은 건가? 호호. 이름이 뭐였지?"


이 병원의 매력이다. 보통 병원에 가면 늘씬하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간호사가 차갑게 이름과 주민번호 같은 것을 묻고 시선을 한번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의원 간호사는 혼자서 프런트도 보고 주사도 놓고 혈압도 재고 피검사도 하면서도 친근한 어조로 환자를 챙긴다. 고물 컴퓨터에 내 이름을 쳐서 뭔가를 확인하곤 누렇게 바랜 옛 차트를 꺼내 의사 선생님 방에 넣어준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 하고 %%&# 해서 왔어요."


의사 선생님은 주사 한 대와 수액 한대를 처방해주셨고 나는 늘 그랬듯 "회복실"이라고 불리는 장판 바닥에 누웠다.

의원의 회복실, 그 흔한 침상도 없이 홑이불 몇개가 깔려있다.

"요즘 아빠만 왔다가시던데 엄마는 안 오시네?"


몸이 아파서 회복실에 누웠는데도 잠이 안 와 뒤척이다 링거를 빨리 맞고 집에 가고 싶어 간호사 아줌마를 호출했을 때였다. 갑자기 아줌마의 입에서 엄마가 불쑥 튀어나왔다.


" 엄마가 요즘 안 오시더라고. 시집을 내지 않으셨나? 내 기억에 그랬는데."


엄마는 문학단체에서 동인지로 시집 몇 권을 냈었다. 책은 잔뜩 배송되어왔는데 줄 사람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아마도 엄마는 가방에 몇 권씩 넣어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나눠줬을 것이다. 이 병원에 와서도 간호사 아줌마한테 한 권 나눠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간호사 아줌마가 엄마 시집 얘기를 어떻게 알겠어.


엄마가 요즘 안 온다고 잘 지내냐는 안부에 불쑥 내 입에서 튀어나올 뻔한 말은 엄마 이제 안 와요, 죽었어요. 였지만 나는  말을 꿀꺽 삼키고 웃으며 말했다.


"엄마 시집 쓴 거 맞아요. 아빠는 여기서 혈압약 타다 먹는데 엄마는 어디 아파서 여기 자주 왔었어요?"


간호사 아줌마는 개인정보보호를 의식한 듯 그냥 한 번씩 오셨었노라, 하고 얼렁뚱땅 대답을 넘기고 내 링거액이 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조정해 주시고 나갔다.


링거를 맞는 내내 잠은 오지 않지 몸은 잠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이지 바닥은 배기지 생각은 많지 온통 혼란스러웠다. 혹시 엄마의 시집이 회복실 안에 비치된 책꽂이에 꽂혀있을까 해서 봤는데 없었다. 하긴 엄마가 그 시집을 쓴 지 2년이 지나기도 했고 애초부터 거기 꽂혀있었던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결혼 전 엄마와 이 동네에 같이 살 때부터 있던 가게가 많이 문 닫았다. 새로운 곳으로 재단장을 한 거리거리에 익숙한 건물과 다른 가게가 매칭 되어 엄마와의 추억이 묘하게 희석되었는데 OO의원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라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세월이 흐를수록 엄마의 흔적이 불쑥 튀어나오는 가게나 병원 같은 곳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자영업자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능하다면 이 동네는 천천히 변했으면 좋겠다. OO의원도 그렇다. 지척의 신식 병원들에 밀려 언제 없어질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라도 애매하게 아플 때 수액을 꼽고 드러누워있을 수 있는 회복실이 그대로였으면 좋겠고 엄마의 안부를 묻는 후덕한 아줌마 간호사도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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