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특별히 일상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이 그랬듯슬픔에 젖어 밤새 울어버린 날도 있었고 범사에 감사하며 깔깔 소리 내 웃는 날도 있었다. 일기와도 같았던 글쓰기를 멈췄던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를 복기하며 고통스러운 기억을 굳이 상기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중단했지만 한 번씩 브런치에 접속하면 많은 이들이 내 글을 읽어보고 있어 새삼 놀랐다. 유입 검색어는 참담했다. 자살. 조현병. 실족사. 추락사. 49재 등등. 이런저런 연락도 많이 받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미칠 것 같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과거의 나와 공통점을 찾은 사람들로부터.
죽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며 (소위 호상이라고 불리는) 노화에 따른 영면부터 갑작스러운 사고로 (나처럼)이게 진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의심이 드는 황당한 죽음을 겪은 이도 있고 처지 비관에 따른 자살도 (쉬쉬해서 그렇지) 드문 일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어떤 원인이든 간에 당사자에겐 말도 못 할 고통을 안겨주는 <죽음>에 대해 접하면 접할수록 묘한 양가감정을 느꼈다면 너무 변태 같은 걸까. 상처가 되면서 위로가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악하게도 내가 너보단 낫지 하는 안도를 느끼기도 하면서 이런 내가 혐오스럽기도 했다.
현재의 내가 어떤지 궁금해하는 타인. 언제쯤 괜찮아지느냐는 질문의 바탕엔 한 일 년 지나면 좀 나아요. 정도의 말이 위로가 될 것이겠지만 그때그때 내 기분 따라 답변이라는 것도 달라졌다.
어느 날은,
"사람은 다 한 번은 죽어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에 운명이 그랬던 것일 텐데 생각하면 슬플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이제 진짜 괜찮은 것처럼 말하다가도
"어떻게 괜찮아질 수가 있나요. 죽을 때까지 제가 안고 갈 슬픔일 것만 같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누가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겠어요. 다시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에 내 고통을 보태 슬픔의 늪을 며칠이고 뒹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항상 같다. 누군가 죽었다는 것에 대해 흔히들 하는 말.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는 말. 그 진부한 말처럼 나 또한 살아는 지더라고. 그러니 따라 죽네 어쩌네 하는 소리 말고 하루 가면 가는 가보다 하고 그냥 가만히 숨만 쉬고서라도 시간을 흘려보내라고. 뭔가 적극적으로 상황을(또는 기분을) 개선해보려 애쓸 필요 없다고. 그냥 숨만 쉬어도 당신은 충분히 수고하고 있는 거라고. 나도 그렇다고.
이런 중에도 몇 가지 의사결정을 했다.
일단 일 년 정도 휴직을 연장했다.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아빠가 책임지고 있는 아빠의 어머니(친할머니)의 거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날 수 없고 현 거주지는 내가 출퇴근하기엔 너무 멀어 휴직을 연장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 이유가 가장 크고 한편으로는 아직 돈 벌러 나가서 이리저리 치일 자신이 없기도 했다. 일이 험하다 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근무해야 하는데.
필라테스를 100회 마치고 재등록을 했다는 것도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체력적으로) 무기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부담이 없되 꾸준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직할 업종 특성상 공부는 그렇다 치고(체력만 되면 스퍼트 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몸만은 망가지면 안 된다는 의식을 하다 보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도 운동은 해야 했다. 운이 없게도 1월에 담낭절제술을 받느라 한 달을 쉬었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근 1년 꾸준히 필라테스를 했다. 아침에 일단 일어나서 나갔다 온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컨디션이 달랐다. 체력이 관리되니 슬픔이 찾아왔을 때 정신적으로 버티는 근육도 조금은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주로 수강하는 강사분이 두 분 있는데 처음보다 근력이 많이 좋아졌다는 코멘트를 했다. 더불어 살이 많이 빠졌다는 말도(총 8kg 감량).
얼마 전엔 세무상담을 받았다. 집을 팔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집을 했을 땐 부동산 경기 상승기 초입에 적은 예산으로 시장 진입을 해서 억세게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와 남편 모두에게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이 되어주는 집이었다. 신혼집이었다. 생애 첫 주택이었다. 친정과 한동 위아래로 살려고 같이 마련한 집이었다. 완공되기만을 기다리며 한층 한층 지어지는 것을 일부러라도 가서 지켜보던 특별한 집이었다. GTX 역세권이라 집값도 많이 올라줘서 매일이 감사했다. 그런데 엄마가 실족사하고 나선 번쩍번쩍한 새 건물이 음울하게만 보이기 시작했다.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난 아직도 엄마가 떨어진 층을 올려다보고 섬뜩함을 느낀다. 그 집에 들어가서 살기라도 하면 그 집이 나도 잡아먹을 것 같은데 비과세를 받으려면 2년간 입주를 해야 한다고 한다. 누구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입주가 되겠는가. 비과세고 나발이고 집을 팔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면 이제 나는 집을 내놓는 동시에 청량감을 주는 새로운 동네를 찾아야 했다. 남편과 여기저기 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동네를 찾았다. 한강을 지척에 둔 배산임수의 땅. 우리 형편에는 좀 돈이 딸 막딸 막 하지만 대출도 좀 받고 평수도 좀 줄이지 뭐.
마지막으로 출간하기로 했던 결정을 취소했다. 원래는 엄마 기일에 맞춰 출간하고자 했었는데. 내가 겪은 일들을 기록에 남겨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 출간에 긍정적인 마음이었는데 복병은 원고 퇴고하는 과정이었다. 애써 잊으려는 기억을 처음부터 헤짚으며 <엄마가 죽었다>부터 시작하려니 불난 집에 기름 들어붓듯 모든 일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가만히 있어도 고통인데 굳이 도돌이표를 찍으면서 내가 얻는 게 무엇일까. 출간 작가 타이틀이 탐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타인의 상처를 보듬을 그릇이 되는 사람도 아닌데 호기롭게 이러고 있을 때인가. <너나 잘해> 하는 생각에 그냥 관뒀다. 그리고 관둔 것은 잘한 것 같다.
오늘은 떡볶이가 무척 먹고싶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2인분 즈음 되는 양이었는데 실컷 먹었다. 심지어 국물까지도 숟가락으로 야무지게 떠먹었다. 특별히 맛있다고 소문난 집은 아닌데 이상하게 무척 맛있었다.
먹고싶다는 의식이 있고 맛있다는 감각이 살아있음을 알았을 때 웃픈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힘들어서 빌빌거리면서도 좋은 것을 찾는 본능이 있을 수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