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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즈 Oct 19. 2021

에너지가 된 사람들



양복점을 운영하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줄곧 술에 취해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민서야 할아버지 죽으면 너 얼마나 울 거야?”, “나 죽으면 자네가 장례 치룰 수 있겠어?” 민서는 할아버지가 죽으면 무한 번을 울겠다고 약속했다. 형부는 자신의 아버지 장례도 홀로 다 치렀는데 무얼 못하겠느냐며,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애써 생각하지 말라고 아빠를 위로했다. 


내 평생 만나보지 못한 할아버지와 대학교 때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여덟 명의 자식을 나아 길렀다.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두 명의 자식을 자신보다 먼저 앞세워 보냈다. 보지는 못했지만, 큰고모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그 무덤 앞에서 장기가 쏟아져 내릴 만큼 울었다고 했다. 


큰고모는 자궁경부암으로 돌아가셨다. 자궁경부암을 판정 받고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큰고모는 한동안 우리집에서 지냈다. 엄마는 그런 큰고모를 극진히 보살폈다. 끼니마다 암에 좋다는 음식을 해 먹였으며, 따듯한 잠자리를 내주었다. 큰고모와 같이 드라마를 보기도 했고,큰고모와 같이 밥을 먹기도 했지만, 큰고모와의 기억이 너무나도 희미하다. 같이 지낸 시간이 기억되지 않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결국 큰고모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암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처음 마주한 가까운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그 이후에 돌아가셨다. 두 명의 자식을 앞세워 보낸 이후였다. 안타깝게도 할머니에 관해 추억할 만한 이야기도, 내게는 없다. 떠듬떠듬 기억을 곱씹어 보니, 대체적으로 이러한 단상뿐이다. 어린이날이나 소풍가는 날이면 지팡이를 짚고 우리집에 찾아와 용돈을 건네줬다. 웃기지도 않은 TV 예능을 보며 깔깔깔 웃어 댔다. 드라마를 볼 때는 상황에 몰입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했다. 병원에 계실 때 만두를 그렇게 맛있게 잡수셨다. 기억의 개수가 왜 이렇게 초라한가. 


큰아버지는 작년에 암 판정을 받으셨다.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로부터 일 년, 큰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코로나19라는 상황에서 치러지는 장례는 보잘 것 없고 초라하며 너무나도 조용했다. 자리를 지킨 건 팔남매 중 살아있는 사람과 그들이 일궈낸 가족들이었다. 그렇게 삼일장을 지냈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돌아온 밤, 텅 빈 집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큰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발인 날,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슬퍼했다. 포천 큰아버지는 “무식아 잘 가,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라고 이야기하며 한참을 큰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큰엄마는 “이 사람아 왜 이렇게 빨리 떠났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슬픔을 입으로 몸으로 표출했다. 그렇게 큰아버지와의 작별인사는 처에서, 자식으로, 형제들로, 조카들로, 이어지며 줄지어 진행됐다.   


큰아버지의 장지는 할머니가 계시는 곳이었다. 큰아버지의 납골당은 그 수많은 납골당에서도 중앙에 자리하게 됐는데, 모든 가족이 위치가 너무 좋다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다들 고이 모셔진 큰아버지의 유골함 앞에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큰아버지의 유골함을 납골당에 모신 후, 할머니를 뵈러 갔다. 영혼의 존재에 대해 다들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딸과 할머니의 며느리들은 할머니의 납골당 앞에서 한 마디씩 중얼거렸다.  


“어머니,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던 아들이 왔네.”

“왜 이 아들이 먼저 왔나 하시겠다.”

“엄마가 오빠 마중 나와 있겠네.” 


할머니는 큰아버지를 마중 나와 있었을까. 아니면 왜 이렇게 빨리 왔느냐고 다그쳤을까. 할머니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할머니도 그때 그곳에 있었을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일이었다.  


그림책 “죽음은 돌아가는 것”을 읽었다. 죽음에 대해 의문이 들 때마다, 때때로 꺼내보는 그림책이다. 작가는 그림책에서 ‘죽는다는 건 물질에서 벗어나 에너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에너지에서 물질이 생겨났기에, 죽는다는 건 다시 물질에서 에너지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정말 죽는다는 건 무엇일까. 몸이 죽으면 그대로 끝나는 걸까. 몸은 죽었어도 영혼은 존재하는 걸까. 정말로 에너지로 되돌아가 가는 것일까. 작가는 이야기한다.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는 결코 답할 수 없다고. 하지만 ‘믿는 것’을 통해서나마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에너지와 영혼의 존재를 믿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들은 비록 삶에 존재하지 않지만, 이따금씩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그들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모두가 기억을 두고 온 도처에서 에너지로 존재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덜 무섭고, 덜 슬플 것 같으니까. 


큰아버지의 양복점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그가 떠나기 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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