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깔끔 떨기 일인자인 G씨는 내가 결혼하면 축의금 삼십만 원에 옵션으로 화장실 청소를 해준다고 했다.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K씨는 내 결혼식 축가를 담당하겠다고 했다. 댄스까지 곁들여서. 때때로 명언을 씨부리며 내 명치를 때려주는 I씨는 가전제품을 사준다고 했다. 내가 아는 술꾼 중 가장 부지런한 H씨는 결혼식 사회를 봐준다고 했다.(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그들이 눈물 나게 고맙다.
하지만 내게는 결혼할 상대가 없다. 앞으로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가볍게 내뱉는 그 말이 불편하다.
이제 내 나이 서른다섯이다. 진작에 갈 친구들은 다 갔고 막바지 막차에 올라탄 친구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화살이 내게로 쏟아지는 건 왜일까. “너는 언제 결혼할래.” 아직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러면 ‘연애’라도 하라고 한다. 나이가 있고, 혼자 살고, 남자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가볍게 내뱉어지는 그 말이, 나는 몹시 불편하다. 요즘 부쩍 들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내가 가엾어 보이는 것인가, 심심해 보이는 것인가, 외로워 보이는 것인가, 안타까워 보이는 것인가, 쓸쓸해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둘인 당신이 혼자인 내가 자유로워 보여 부러워하는 것인가! 어디에 답이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제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이제 그런 말에도 격앙된 말투로 대꾸하지 않는 ‘연륜’이 필요하다. 이제 그러한 말에도 ‘우아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혼자 노는 것이 처량해 보인다면 그건 당신이 구시대적 발상을 가진 촌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혼자 놀기 때문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옛 애인과 헤어진 후, 몇 년간 말도 안 되는 경로를 통해 수많은 친구를 사겼다. 그들은 때로 내게 영감을 주고, 닮고 싶은 점을 따라하게 만들며, 나의 유머감각을 잃지 않게 해준다.
연애를 오랫동안 하지 않으면 ‘연애세포’가 죽는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 능력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꾸준하게 ‘아무나’ 만나보라고 말한다. 물론 다양한 사람을 만나봐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떤 부류가 나쁜 인간인지 꿰뚫어 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꼭, 그렇게,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그래야 하나. 피곤하게. 연애가 아니라도 내 세상에는 재밌는 게 너무나도 많은데.
내가 사는 목표에는 ‘잘- 사는 것’이 있다. 그것도 아주 죽여주게. ‘잘- 사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글을 잘 쓰는 것, 몸이 아프지 않은 것, 술 마시자고 불러주는 친구가 있는 것, 몸 하나 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있는 것,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 입고 싶은 옷을 마음 것 살 수 있는 것,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 하지만 잘- 사는 것에 연애나 결혼 같은 것은 없다.
사람들이 서른다섯의 나를 바라볼 때 나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봐주면 좋겠다. 아직 결혼하지 못한 서른다섯이 아니라, 여전히 남자친구 없는 서른다섯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세계로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그 어떤 애의 애인이나 누군가의 부인이 아니라, 그냥 내 자신 그 자체 그것만으로.
아씨- 그런데 왜이렇게 변명처럼 들리는 거지.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러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