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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수가 없을 땐 일단 칼을 갈자

by kleo


사람이 좀 멍.. 해지는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때로 멍 때리는 것도 뇌에 휴식을 주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한테 멍은 대체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말 그대로 뇌가 정지한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좋아하는 순간은 아닙니다. 평소에는 온갖 생각을 돌아가면서 하고, 지난 기억도 꺼내오고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도 가져와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머리가 복잡한데, 그런 제가 정지상태로 멍하다는 건 진짜 큰일이 난 것처럼 여겨지거든요. 심지어는 좀 무기력해진달까요. 특히 제가 손쓸 수 없는 일에 화가 나기도 하고,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머리가 멍해지다가 무력하다는 기분이 온몸을 덮칩니다. 하필 오늘이 좀 그런 날이네요.


어느 날은 친구한테 ‘뾰족한 수가 없을 땐 일단 칼을 갈아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방법이 없거나 모르겠을 때 무리해서 답을 내지 말고, 일단 침착하게 칼을 갈면서 답이 보일 때를 기다리자는 뜻입니다. 모호한 답도 손에 쥐지 못한 채 성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친구한테 한 말이지만 스스로도 그 말을 새기면서 ‘지금 무기력하다는 건 아직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니 일단 조금 더 시간을 갖자’ 생각합니다. 그리고 머릿속으론 폭포가 시원하게 흐르는 절벽 아래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도사가 슥-삭-슥-삭 날을 가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폭포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 날카로운 칼날 소리, 얼굴을 지나가는 바람 등이 차례로 느껴지면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거든요. 멍해졌다가도 그 이미지를 떠올리면 꽤 금방 정신을 차릴 수도 있고요.


마침 글도 잘 안 써지는데, 또 또 하루 종일 신나 있는 윗집 아저씨에게 시달리느라 잠시 멍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해요. 멍 때리느라 흐려졌던 시야도 다시 초점이 맞고요. 근데 언젠가 저도 상상 속 도사처럼 실제로 칼을 갈아볼 날이 올까요? 제가 가진 칼이라곤 고작 주방칼 혹은 택배 뜯는 문구용 칼뿐인데, 장검을 가는 건 조금 무서운데.. 연필이라도 돌려 깎으며 흑심을 날카롭게 만들어보겠습니다. 그 정도가 제게 제일 알맞은 것 같아요. 물론 그런다고 답 없는 글 속에서도, 윗집에 대응할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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