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무슨 악상이 떠오른듯 와다다 쓰는 사람이 있고, 한참을 빈 문서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날엔 방문 두드리는 소리에 악상이 떠오른 베토벤처럼 확 번뜩일 때가 있고, 또 다른 날엔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오후 내내 텅 빈 화면과 눈싸움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제가 와다다 쓸 수 있는 글은 지금 쓰고 있는 글처럼 아무런 주제도, 하고 싶은 말도 없을 때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들 중 아무거나 잡아다가 쓸 수 있을 때입니다. 어떤 이야기든 글로 쓸 수 있으니 주제도 분량도 자유롭기 때문이지요. 누군가는 이 자유로움이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특정 주제를 가지고 계속 글을 써내다 보니 이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최근에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저와 딱 맞는 책을 발견해서 신나게 읽다가도 후루룩 금방 먹어치우듯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애써 속도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책을 오랜만에 발견해서 이 책은 꼭 소장해서 꼭 책상에 올려두려고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 책은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가 쓴 에세이고요. 매일 뭔가를 써보고자 하지만 잘 되는 날도 있고, 잘 안 써지는 날도 있듯이 매일 시작했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는 글쟁이들이 특히 공감할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저도 매일을 썼다 지웠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떠다니는 생각들을 그대로 쓰겠다 다짐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글쓰기 루틴을 만들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면서 일정 퀄리티의 글을 뽑아내는 것은 꽤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이 책의 작가는 글쓰기를 일로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근하듯 매일 쓴다고 말하며, 서두르지 않고 쉬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서두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쉬지는 않는 일.. 각자 모두가 이런 일이 있을 텐데, 저에겐 그것이 마침 글쓰기라 더 마음이 갔습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이 한 문장에서 숭고함이 느껴져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만약 제가 책에 줄 쳐가며 읽는 독서 방식을 가졌다면, 줄 치느라 좀 더 천천히 읽었겠다- 싶을 만큼 저에겐 공감되는 문장이 많았습니다.
아, 지난 일요일엔 극장에 가지 않았어요. 대신 카페에 가서 오늘만은 카페에서 우울감을 이겨내 보겠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비장함으로 우울감 따위는 꾸욱 눌러 뭉개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랜만에 카페에 간 게 들떴는지 평소엔 마시지도 않던 라떼를 주문했어요. 제가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채, 두유 변경 같은 옵션은 과감하게 무시했지요. 그리고 우울감을 느낄 새도 없이 복통이 끼어들어 얼른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라떼를 시킨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 한편 원망스럽기도 한 일요일 오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