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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Sep 06. 2019

<산허구리>, <동승>의 작가 함세덕

         -그의 희곡 <무의도 기행>의 무대를 찾아서 -


현해당의 인문기행 24


함세덕은 인천 출신의 극작가다. 목포부청(木浦府廳)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목포에서 보내기는 했으나 초등학교 2학년 때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국민학교)와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주로 금융 계통의 회사에 취직하던 친구들과 달리 함세덕은 경성의 본정통[현 충무로]에 위치한 서점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취직했다. 학창시절부터 품었던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다. 약 1년 동안 서점에서 일하면서 극작가 유치진(柳致眞) 등을 알게 되고 이런 인연으로 1936년 최초의 희곡 「산허구리」를 『조선문학』에 발표한다. 이후 창작활동에 전념한 함세덕은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대회 참가작인 「동승(童僧)」을 발표하고,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해연(海燕)」이 당선되며, 이듬해인 1941년에는, 「산허구리」, 「동승」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무의도 기행」을 발표한다.

소무의도 포구. 한때는 조기사리, 민어사리, 동아사리를 위한 배들로 흥성스러웠을 것이나 지금은 작은 고깃배 몇 척만 한가로이 떠있다.


「무의도 기행」은 1930년대 후반의 어느 겨울 초입, 서해안의 작은 어촌 ‘소무의도(작은 떼무리)’를 배경으로 한다. 지금은 큰 떼무리와 작은 떼무리가 인도교로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는 나룻배로 오가던 시절이었다. 등장인물은 늙은 아낙 공씨(孔氏)와 그녀의 남편 낙경(落京), 아들 천명(天命), 공씨의 동생 공주학(孔主學) 부부, 한의사 구주부(龜主傅)와 딸 희녀, 뱃사람 등등이다. 공씨의 남편 낙경은 본래 강원도가 고향이나, “염평(연평) 가서 조기만 잡으면 돈 벌긴 물 묻은 손에 모래 줍기”라는 소문에 휩쓸려 집 팔고 땅 팔아가지고 와서 작은 떼무리에 정착했다. 승승장구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재래식 목선에 의지한 어로방식으로는 신식 발동선의 그물질을 당해낼 수 없어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두 아들을 바다에서 잃었고 혼인날짜까지 잡은 외동딸은 그물 밑천으로 술집에 팔아넘겼다. 이제 남은 것은 막내아들 천명(天命)이 하나뿐, 한사코 배를 타는 것을 싫어하여 항구에 있는 일본인 가마보코[어묵]집 직원으로 취직시켰으나 1년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극은 가마보코 집을 뛰쳐나온 천명이를 공주학의 중선 배에 태우려는 세력과 이를 만류하는 세력 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된다.


공씨 강원두서 숫(숯)이나 굽고, 강냉이나 닐구구(일구고) 있었으면 아무 일 없는 것을...염평( 연평)가서 조기만 잡으면 돈 벌긴 물 묻은 손에 모래줍기라구 하드니…….

낙경 (벌컥 소래(소리)를 질른다) 그 넋두리 고만 해.

공씨 (벌떡 일어서며 쏘아부친다) 집 팔구 땅 팔아 가지구 와서 작만(장만)한 게 뭐야? 큰놈 둘째놈 장가두 못 보내구 물에서 죽이지 않았어? 봉치(봉채)까지 받어논 다 큰 년을, 돼지새끼 팔아치듯 팔아가지구, 중선 미천(밑천) 찔러 넣지? 그래두 다 못해서, 인제 열일굽(열일곱) 먹은 막내둥이 하나 있는 걸 마저 잡아먹을려고? 못해, 못해, 못해. (미칠 듯이 규환(叫喚)을 치며) 또 송장두 못 찾게? 또 송장두 못 찾게?

낙경 저게 귀신이 썼나? 왜 악을 쓰구 이래?

공씨 또 갱변에 념하다 놓진(놓친)친 년처럼, 우둑허니(우두커니) 주저앉아서 송장 떠내려 오기만 기대리라구? 못해, 못해.

안산에서 바라본 소무의도인도교. 작은 떼무리 선착장과 광명항 선착장을 잇는 타원형 모양의 다리로 길이 414미터, 폭 3.8미터이다. 지난 2011년 4월에 준공했다.


하지만 천명은 겨우내 굶주림에 시달려야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아버지의 그물 밑천이 되어 술집으로 팔려나간 누이를 데려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른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가 탄 배는 동아[숭어]를 가득 싣고 항구로 돌아오던 중 모진 풍랑을 만나 파선하고 만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을 통해 작가가 암시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풍랑에 휩쓸린 그의 주검은 부서진 널쪽에 몸이 묶인 채 멀리 해주항에서 발견되었다.


일본의 갑작스런 경제보복으로 한일 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8월 중순, 함세덕의 희곡 「무의도 기행」의 배경인 소무의도를 찾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잠진항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지금은 잠진도와 무의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겨서 교통이 훨씬 편리해졌다. 광명항에서 마을버스를 내리자 멀리 소무의도와 함께 푸른 바다 위를 가로질러 서있는 아름다운 다리가 시선을 끈다. 자동차는 건널 수 없고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소무의도 인도교다. 푸른 파도 위를 달리는 쾌속선의 하얀 물보라를 구경하며 다리 위에 오르자 저만치 앞에 아기자기한 모습의 소무의도 포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철마다 민어잡이, 조기잡이, 새우잡이 배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는 포구지만 지금은 서너 척의 작은 어선만이 옛 영화를 그리듯, 파도에 출렁이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서서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포구로 돌아오는 작품 속 천명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노틀하라범 (입에 침을 튀기며) 아무튼 그때는 배에다 십오원 각수식(씩) 하는 광목을, 두 필이나 통째 풀어서, 칭칭 감구 푸장(포장)을 쳤었으니까…(딸곡질을 하며) 돼지를 다섯마릴 잡었구, 갈보를 열명을 불렀다면, 고만이지.(딸곡질)

옘평(연평)서 한바탕 두드려부시구, 봉죽(豊漁旗)을 물에다 질질 끌구 풍악 갖춰 떼무리루 들올 땐, 녜전(예전) 김종서(金宗瑞) 녀진(女眞) 치구 들오는 것보담 더 장했어, 구경꾼들이 인산 떼같이 들끓었거든.(딸곡질)

늙은 어부 참 중선이라는게 사내놀음이지.

노틀하라범 안 될랴면 조상 산솔 팔아넣구두 빈손 싹싹 비비지만, 걸리는 날이면 몇 만 원 잡긴 상치쌈에 식은 밥이지.(딸곡질)

키큰 어부 엠평에 천명아버지가 쓱 내리면 계집이란 계집은 다 몰려왔었어.

늙은 어부 주머니에서 돈을 푹푹 집어줬거든.


하지만 이 같은 호사도 잠시, 대규모 자본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의 고깃배를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어부들이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한 때는 여진족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김종서 장군보다 더 장했던 천명아버지의 기세도 급격히 꺾여 마침내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음의 바다로 내몰 수밖에 없는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소무의도 인도교에서 바라본 해상 풍경. 소무의도 주변 바다는 수심이 깊어 물빛이 푸르고 장쾌한 맛이 있다. 빠르게 질주하는 쾌속선의 물보라가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게 한다.
큰떼무리와 작은 떼무리 사이. 왼쪽이 대무의도, 오른 쪽이 소무의도이다.


소무의도는 면적 1.22㎢, 해안선 길이 2.5㎞의 작은 섬이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누리길을 따라 소무의도 최고봉인 안산 정상에 오르자 멀리 덕적, 영흥, 대부 등의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전망대를 겸한 정자, 「하도정(鰕島亭)」에 올라 잠시 흐르는 땀을 씻으며 푸른 바다와 그 바다 사이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바라본다. 한 때는 내게 고립과 단절의 표상이었던 섬이 이제는 어느덧 그리움의 표상이 되었다. 삶이란 어쩌면 저마다의 가슴에 섬 하나씩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만이 알고, 나만의 출입이 허락되는 섬, 그 섬에서 가서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으며 내 안의 참된 나를 만나고 싶다.

하도정(蝦島亭). 소무의도 최고봉인 안산 정상에 있으며, 하도정이라는 이름에서 이곳이 옛날에 새우가 많이 잡힌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녀섬. 소무의도 남쪽 해사에 있으며, 옛날 전복을 따던 해녀들이 쉬었던 섬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도정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누리길을 따라 몽여 해변에 이르자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팔미도(八尾島)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학시절, 교련시간마다 ‘월미 팔미 섬을 감돌아 오대양이 통한 곳, 빛나리라 우리 학원은 〇〇대학교...’라고 목청껏 부르던 교가, 그 교가 속 팔미도가 바로 눈앞에 있다. 팔미도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남서쪽으로 13km, 소무의도에서 동쪽으로 6㎞ 떨어진 무인 섬이다. 1903년 6월 1일, 일제가 러일전쟁에 대비해 세운, 대한민국 최초의 등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팔미도 등대가 불을 밝힌 이후 일제의 조선 침략은 더욱 노골화 되었고, 일본인들의 자본력과 기술력은 조선의 모든 산업을 빠르게 잠식했다. 함세덕의 희곡 「무의도 기행」에도 당대의 이런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소무의도 몽여해변에서 바라본 팔미도
하늘에서 본 팔미도(사진출처 인천관광공사)
팔미도 등대.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 1일 첫 불을 밝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사진출처 문화재청)


공씨의 남편이며 공주학의 매부인 정낙경은 한 때 조기장군, 새우장군 소리를 들을 정도의 서해바다를 주름잡는 어부였으나, 재래식 풍선(風船)과 그물로는 더 이상 발동기와 저인망, 건착망 등 신식 그물로 무장한 고깃배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 고깃배의 선주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고, 비록 조선인이라 해도 그들은 이미 일본인 중심의 새로운 어업질서에 편입된 사람들이었다. 어업조합이 생기고, 입찰, 경매 등의 새로운 제도가 생겨난 상황에서 자본력과 기술력이 부족하고 시대의 변화에도 둔감한 정낙경의 삶은 끝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주학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알고 거기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해가는 인물이다. 정낙경 대에 선주와 선원의 관계가 동업[同事] 관계였다면 공주학의 대에 와서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형태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정낙경의 대에는 풍어 때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된 선원들이 많았지만 공주학의 대에는 부가 선주에게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공주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카 천명마저 폐선 직전의 위험한 고깃배에 태우는 인물이다.


노틀하라범 그때 동사하든 눔들, 나 빼놓군 다 잘 됐지. 다 잘 됐어. (딸곡질이 작고(자꾸) 나옴으로 안을 向하야) 게서요?

젊은 어부 아무두 없나 본데요.

노틀하라범 (부엌으로 들어가며)정첨진 싸전을 내구 한쪽으로 돈노릴(돈놀이를) 하지, 황서방은 강화 가서 비단전을 냈다지 않나?

(물을 한 바가지 떠들고 나와 꿀덕 꿀덕 마신다.)

키 큰 어부 칠성 하라버진(할아버지는) 먼우금다(먼우금에다) 땅 사지 않었어요, 웨? 이번에 수원 가는 철로가 생기자 륙전(6전)씩 주구 산 게 매 평에 이원오십전(2원 50전)식 올랐대요.

(중략)

직지사서 왔다는 어부 그런데 어떻거다(어떡하다), 천명아버지가 실패하셨나요?

노틀하라범 (담배를 한 대 피여물며) 다, 이 노틀하라범 말을 안들은 탓이지.

직지사서 왔다는 어부 아-니 웨요?

노틀하라범 사월에 옘평서 첫 둥을 보구, 칠월에 둘째 둥을 보러, 우리가 칠산(七山)을 들어가지 않었겠나? 팔도서 「내로다」 하는 그물안(그물주인), 배임잔 다 몰려왔었지만, 그중에서두 새우장군 조기장군 하면 떼무리 정낙경을 첫손 첬거든. 아, 쑥 우리가 들어가니까, 군산서 왔다는 나가사키(중선)가, 벌서 쟁기를 두 줄루 우리 어장에다 떠왔데 그려. 우리가 가만이 물쌀을 보니까, 조기떼가 그 쟁기 새루(사이로) 몰려 갈 것 같단 말이야. 이거 참 난처하드군. 천명아버진, 그 새루 떼를 쫒아가자구 하구, 난 위태하다구 하구, 한참 싱강일(실랑이를) 하다가, 천명이아버지 말데루 뚫구 가기루 했었지. 아니나 다를가? 그 놈들이 물속에다 데구리(底曳網)을 쳐놨데 그려.

직지사서 왔다는 어부 군산 가서 재판했다는 게 그 얘기군요?

노틀하라범 남의 그물을 왼통 망처놨으니 물어주는 수 박게(밖에).


몽여 해변. 팔미도와 함께 송도신도시, 청라국제도시를 조망할 수 있다. 사진 중앙에 우뚝 솟은 3층 건물이 ‘섬 이야기 박물관’이다.


몽여 해변의 조용한 카페에 앉아 왁자지껄 떠드는 극중 어부들의 넋두리를 상상해본다. 결국 천명은 외삼촌 공주학의 강요에 못 이겨 고깃배에 올랐다가 비명횡사하고 마는데, 천명의 이런 운명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사지(死地)로 내몰린 일제강점기 대다수 민초들의 암울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송도 신도시와 청라국제도시, 영종 하늘도시 등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어느덧 광복 74주년을 맞이하였음에도 이 땅에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의 일제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반발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이 가시화되고 있는 마당에 한 쪽에서는 아직도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하고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터져 나오고 있다.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몽여 해변 한쪽에 우뚝 솟은 ‘섬 이야기 박물관’이 보인다. 수십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뚜렷한 아이템을 찾지 못한 채 방치되다시피 하여 전형적인 혈세 낭비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건물이다. 이 박물관에 함세덕 소극장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곳 소무의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 「무의도 기행」 뿐 아니라 「동승」, 「산허구리」 등 그의 대표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다면 한동안 우리 연극사에서 지워졌던, 함세덕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해결해야할 문제도 있다. 함세덕은 일제말, <낙화암>, <무영탑>, <묵경정(黑鯨亭)>, <추장(酋長) 이사베라>, <어밀레종>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고, 그런 까닭에 그의 이름은 지금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광복 후에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고, 1947년 무렵 월북해서는 <대통령>, <山사람들>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6·25 발발 직후 남하하던 중 폭발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해외문학파도 카프계열도 신파극계열도 아닌 정통 신극작가로 등단한 인물로, 스승 유치진에 못지않은 뛰어난 감각과 극작기법으로 우리 근대극을 한 단계 진보시킨 작가라는 평가 있는가 하면, 시류에 영합해 지조 없이 살다간 부나방 같은 인물이라는 혹평도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문득 그를 생각하면 남과 북 어느 체제에도 순응하지 못하고 남지나해 푸른 파도에 몸을 던진, 소설 『광장』 속 주인공 이명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우리 역사의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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