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도망칠 수 없는 속도로 몰려왔다. 집채만 한 파도를 뒤집어쓰고서도 정신없이 흘러드는 잡동사니들을 건져내야 했다.
우리는 동아줄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뭐라도 잡아야 했다.
1.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아비규환이었던 일요일 저녁, 할머니가 피를 흘리며 구토를 하는 동안 이웃집에서는 119를 불렀고 나는 손톱을 씹으며 전화를 돌렸다. 당장 할머니에게 갈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할머니에게는 아들도, 딸도, 며느리도 아닌 손자들이 있었다.
나는 전주에 있었고, 차가 없었고,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여러 가지가 걸렸다.
공무원 발령을 기다리던 둘째가 제일 먼저 닿았다. 할머니가 이송되는 동안 함평에서 출발해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회사 면접을 앞두고 목포에 있던 셋째도 허겁지겁 버스를 탔다. 대학교 마지막 학년을 온라인 강의로 때우고 있던 넷째는 나중에서야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30여분 뒤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머리뼈에 금이 가 뇌에 피가 고여있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안된다고도. 응급실에서 3일, 중환자실에서 적어도 일주일이라는데 학교에 가서 연가를 내야 하나, 언제쯤 병원에 갈 수 있을까 바쁘게 달력을 넘기며 가늠했다. 기어코 중환자실까지 가 있는 할머니가 밉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동생은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응급실에서도 보호자 한 명 빼고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누나가 와도 어차피 할머니 못 봐. 그냥 우리끼리 교대하며 있으려고."
전화기 너머로 아프다고 칭얼대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을 돌아다니다 자리에 누웠다. 선잠에 들었다가도 새벽 내내 여러 번 잠에서 깼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2. 24시간 상주할 수 있는
출근해서 회의를 듣고, 업무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불행한 시나리오들이 쓰여졌다.
이틀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떨어져 머리를 부딪힌 곳이 위험하지 않은 위치이고, 할머니가 집에 들어가지 못해 정신없이 이웃집 문을 두드려댄 덕에 응급실로 빨리 이송된 게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만약 계단에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있었거나 온전치 못한 의식으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 옆에 24시간 누군가가 붙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다행이 아니었다. 간호사가 할머니에게 필요한 소모품을 속사포로 읊고 갔다며 동생이 사진을 찍어 보냈다.
기저귀, 물티슈, 비닐장갑, 컵, 베개, 수건, 샴푸... 그중에 제일 급한 건 간병인이었다.
병간호의 시작
보호자 안 계실 거면 간병인 구하세요. 환자분 옆에 24시간 있어야 해요.
나와 동생들은 모두 20대로, 각자 학교에 다니고 일을 하느라 할머니를 떠나 있었다. 환자 옆에 하루 종일 붙어있을 누군가를 당장 어디에서 구해야 한단 말인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이 밤을 새워서 피곤하다고 하소연했다. 일요일부터 이틀을 내리 할머니 옆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인터넷에 간병인을 부르는 법은 나와 있었지만 연락처는 찾기가 어려웠다. 원무과에서 간병인협회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협회에서는 환자와 간병인을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 정확한 비용과 기간은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 아는 거라고 했다. 연결해 준 분께 전화를 걸어 할머니 상태와 병원 위치를 말했다. 지방의 경우, 하루 간병비는 식대를 포함해 11~12만 원 선이다. 일단은 일주일 정도를 부탁드렸다. 머릿속 계산기가 바쁘게 돌아갔다. 할머니가 한 달간 입원해 있는다면, 간병비만으로 내 한 달치 월급이 날아간다. 눈 앞이 아찔했다.
3.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간병인을 부르고 나서가 끝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물에 빠졌다나와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간병인은 소변줄에 매달린 소변통을 갈고, 기저귀를 갈고,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고, 의사나 간호사의 처치를 돕는 역할을 착실히 했지만 까다로운 할머니를 버티는 일만은 하지 못했다.
치료를 받으며 할머니는 숟가락 들 힘만 생겨도 집에 가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왜 나를 여기 넣어놨냐!"면서 난동을 부렸고, 자는 동안에도 자주 비명에 가까운 잠꼬대를 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급기야는 간병인에게 너는 누구냐며, 왜 여기 있냐고 욕을 해댔다고 했다.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저 오늘까지만 할라고요. 도저히 못 하겠어요. 다른 사람 부르세요.
결국 그렇게 힘들게 부른 간병인도 3일 만에 손을 들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쪽지에 적힌 다른 협회 번호로 전화를 돌렸다. 그만두면서 어떻게 하소연을 했는지 업체에서는 할머니 이름을 말하자마자 "알아보고 이따 다시 전화 줄게요~"하고서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얼마나 힘들었을지 납득이 갔다. 동생들은 평일 시간을 쪼개 교대로 간병을 하고, 나는 금요일 저녁 퇴근해 병원에서 주말을 보냈다. 할머니는 병원에 자기를 두고 갈까 봐 병상에 눕지도 않으려고 했다.
할머니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식사도 안 하려 했다.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집이었다. 집에 갈 수 있을까.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되고 혼자 용변도, 식사도 해결 못 하는데 집이 가당키나 한가.
나는 요양원, 요양병원, 요양보호서비스, 재가간병서비스 등을 검색하며 정보의 바다를 떠돌았다.
요양시설로 가면 그곳도 할머니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침대 위에서 치료 외에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는 할머니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삶을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을 유보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간절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의 고집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시 주치의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자의퇴원동의서를 내밀었고, 할머니는 응급실에 실려간 지 일주일 만에 병원을 나왔다. 우리 넷은 할머니를 태우고 가면서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며 농담을 던졌다. 그녀의 기적 같은 회복력에 놀라고, 입, 퇴원 날짜를 일요일에 맞춘(?) 배려에 감사했다.
잊지 못할 일주일이었다.
계단에서 떨어진 할머니는 병원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동아줄을 잡듯 손자들 손을 꼭 붙잡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