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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색 Feb 16. 2023

먹방보다 쿡방

음식 만드는 걸 구경하는 게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틈만 나면 유튜브 쿡방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원래 난 먹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 대충 끼니를 때우는 형편이라 당연히 요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미각이 둔해서 맛집 일품요리를 먹든 단체 급식 같은 백반을 먹든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허기만 채우면 되니까 그저 먹을만하면 상관없었다. 바쁠 땐 귀찮아서 점심을 삼각김밥과 커피 우유로 때우기 일쑤였으니 말 다했지. 가족과 친한 지인들의 걱정을 살 정도로 식생활을 잘 챙기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달라졌다. 요리에 관심이 생겼다.


정확히는 쿡방-남이 요리하는 영상-을 보는 게 너무나 재밌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즐거움이다.


음식이나 먹는 행위 자체에 관심이 적으니, 타인이 기괴할 정도로 많은 음식을 먹어치우는 먹방 영상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보았다. 그런데 쿡방을 보는 게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미처 몰랐다.


다 유튜브 때문이다. 아니 시작은 팬데믹 때문이었다.


배달 음식도 질렸고 당장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요리법을 찾아 백 선생 요리 채널을 본 게 시작이었다.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요리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비슷한 채널이 추천 영상으로 뜨기 시작했고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더니 맛나 보이는 음식 썸네일과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완벽하게 설득당했다고 할까. 어느새 몇 개 채널을 구독할 정도로 요리하는 영상에 빠져 버렸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현실이 됐다. 요리하는 영상 속 손놀림을 자꾸 보다 보니 눈에 익고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게 됐다. 막막하기만 하던 갖은양념이 뭔지 드디어 알게 됐다.


신선한 제철 재료의 맛과 영양을 최대한 지키려는 한식의 특성상 발효 양념인 간장된장고추장을 주로 활용하는 조리법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비슷하게 반복되는 양념 제조법과 레시피, 재료 다듬는 과정 등을 여러 번 보니 눈에 익어 저절로 기억하게 됐다.


결정적으로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 진짜였다. 언제부턴가 영상 속 요리하는 손을 내 손으로 인식한 건지 근본 없는 자신감까지 생겨버렸다.


그래서였다. 사 먹기만 하던 반찬을 내 손으로 만들어봤다.


유튜브 요리 채널에서 본 레시피 그대로 만들어봤다. 어느 요리 유튜버가 가르쳐 준 치트키를 사용해 '감자와 어묵볶음'을 순식간에 완성했다.


맛을 본 엄마가 입맛에 맞다고 하셨다. 다행이다. 솔직히 내가 먹어도 맛나다. 야채(감자, 파, 당근)와 어묵만 준비해서 시판 중인 '소불고기 양념'(치트키)으로 맛을 낸 거니 이게 진짜 대기업의 맛 아닌가?


무엇보다 쉽다. 요령 없고 느려 터진 곰손도 가능했다. 야채 다듬고 썰고 양념 섞어 볶고 조리는데 채 20분이 넘지 않았다. 재료만 준비하면 맛 내기는 만능 양념 역할을 해 준 '소불고기 양념'이 다했다. 간장 베이스에 과일이 들어가 달큼하고 짭조름한 감칠맛까지 다 잡았다. 이만하면 밥반찬으로 합격 아닐까.


물론 난 장금이가 아니다. 아니 흉내조차 못 낸다. 맛의 미세한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짠맛, 단맛, 신맛, 매운맛, 쓴 맛 등 강렬하고 확실한 맛 외에는 미묘한 차이나 복합적인 맛은 알아채지도 못하거니와 표현도 어렵다. 그래서 웬만하면 대충 먹을만하다 정도이지, TV 요리 프로그램에서 맛 평가단이 시식 후 놀라운 맛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엄청난 찬사를 표현할 때 과장 같아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남들은 맛있나 보다, 나는 그저 이만하면 먹을만하다.' 정도라서 감흥이 크지 않았다. 미적지근하달까.


물론 지인이나 가족들이 만들어준 경우, 의식적으로 '맛있다' 외치며 칭찬 봇이 되긴 하지만. 실제 내 미각 세포의 감각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뇌의 인지능력과 언어 표현 등이 총동원되어도 한계는 분명하다. 구별할 수 없는 맛 차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뿐이다. 배만 채우면 되니까 음식이나 요리법에 무관심할 수밖에.


그러다 나이 들고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로 살찌는 체질로 바뀐 건지 최근 몇 년 사이 10Kg 가까이 체중이 늘었다. 물론 천천히 살이 찌다가 팬데믹 기간에 남들만큼(한국인 평균 5Kg 이상) 급격히 늘었다. 귀밑부터 턱 부분까지 살이 붙어 둥그스름해진 데다 옷을 입으면 여유공간이 사라져서 통나무 몸매처럼 굴곡이란 게 완만하다 못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그래서였다. 다이어트를 위해 식이조절과 식단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 먹는 음식을 멀리하고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비혼으로 살아갈 혼 삶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해 먹을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히 섰다. 다만 할 줄 아는 요리라곤 김치볶음밥과 참치김치찌개, 미역국 끓이기가 전부였다. 도움이 절실했다.


그 후 누구나 다 아는 대한민국 대표 요리 선생인 백 선생의 쉬운 요리 방법과 레시피를 참고하게 되었고 영상이라서 보고 따라 하기가 쉬웠다. 실제 요리를 직접 해본 경우는 많지 않지만 영상으로 여러 요리법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점점 요리가 친근해지고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다 이건 좀 해볼 만하다 싶은 레시피에 도전해 봤고 '간'만 잘 맞추면 대충 먹을만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게다가 몇몇 채널의 유튜버들은 나와 같은 초보 요린이(요리+어린이)를 위해 따라 하기 쉽게 최적화된 레시피로 직접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지루하지 않고 재밌는 편집과 설명을 곁들여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도전 정신을 일깨웠다.


게다가 남이 요리하는 걸 지켜보는 게 이렇게 재밌고 흥미진진할 줄이야. 남들 다 보는 먹방도 보지 않던 내가 쿡방을 보게 된 것이 나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고 신기했다.


실제 요리를 할 때 참고하기 위해 유튜브 영상 중 해당 요리를 검색해서 보는 게 아니다. 그저 맛있어 보이는 요리, 또는 전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 요리나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도전 욕구가 샘솟는 레시피 등을 알기 위함이다. 실용적 접근이라기 보단 순수한 지적 탐구에 가깝다.


식재료 손질부터 다듬고 자르고 썰고 다지는 과정에서 현란한 칼춤, 각종 요리 기술과 다양한 요리 기구 사용법과 양념 만들기, 사이사이 요리하는 사람들의 노하우와 맛 내기 비법 등을 낱낱이 알려준다. 실생활 적용에 유용한 데다 지적 호기심까지 채워준다.


영상이라 당장 먹을 수도 없는 '못 먹는 떡'이 만들어지는 걸 구경하다 보면 바로 따라 하기보다 배달 앱을 켜서 나도 모르게 유사한 음식 메뉴를 검색해 시켜 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리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게 모르게 요리 상식과 요령이 쌓이고 있다. 확실히. 예전엔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요리들을 겁 없이 일단 시도해 볼 정도로 배짱과 용기도 생겼다.


아까운 식재료만 버릴까 봐 아예 부엌 근처도 가지 않고 식사 후 뒷정리나 설거지만 담당하던 나는 과거가 되었다.


최근엔 당연하게 사 먹던 반찬들도 쉬운 것부터 직접 만들어 보는 중이다. 어느 정도 비슷하게 맛이나 형태, 모양 등을 따라 했더니 엄마나 조카가 내가 만든 요리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요리 영상을 보다 요리하는 재미를 알아차리게 됐다.


할 수 있는 요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 여전히 요린이에 머물러 있지만 어느새 자신감이 근육처럼 몸집을 키웠다. 몇 가지 종류는 맛있다는 찬사도 여러 번 듣고 나니 스스로 먼저 하겠다 나서기도 한다.


요리에 대해 관심도 열정도 전무했던 과거의 내가 놀랄 만큼 요리법에 관심이 생겨 이참에 '한식조리사' 자격증 취득에 대해 생각하다, 어처구니없게도 온라인 반찬가게를 내볼까 사업구상에 이르렀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운 아기가 당장 마라톤 선수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은 셈이다.


솔직히 나에게 요리는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초라해서 효율이 형편없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요리에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귀찮아서 끼니 때우기도 대충이었던 내가 기꺼이 번거로운 과정-식재료 선정부터 재료준비와 조리과정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식재료를 찬물에 씻고 일일이 다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준비한 뒤, 뜨거운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온 신경을 집중해서 만드는 건 결국, 요리를 완성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엄마, 조카, 동생부부, 이모 등등 가족들과 나눠먹는 기쁨과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다. 정성을 담아 만든 요리를 소중한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이 곧장 내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맛까지 좋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요리하는 게 재밌고 더 잘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혼자 먹기 위한 요리는 단순히 생명 연장을 위한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기쁨만큼 의미 있지 않을 터.


요린이로서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실력도 자연히 쌓이리라. 레시피 영상을 찾아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요리 목록이 하나 둘 계속 늘어나다 보면 머지않아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빠르고 능숙하고 맛있게 뚝딱 만들어내는 '요리 잘하는 그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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