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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Jan 15. 2020

졸업장

오늘을 보기 위해 우리는 6년을 기다렸을까



매년 졸업식땐 아이들 졸업장을 쓴다. 아이들의 졸업장을 쓰는 일은 쉽지가 않다. 아이 한명 한명 어떤 말을 쓸까 고민 고민이다. 내가 놓친 것이 있을까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곤 한다.

졸업하는 아이들과 많이 싸웠다. 몸으로도 싸우고 말로도 싸웠다. A는 유난히 몸으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다. 와서 쿵하고 가면 나는 휘청한다. A는 불만이 있을 때 옆으로 와서 툭 밀치고 간다. 몸이 휘청하는데 옆을 보면 벌써 어디 가고 없다. 급하게 쫒아가면 시치미를 땐다. 누구라도 다 알도록 큰 몸짓과 소리로 휘청이게하고는 시치미를 떼는 A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겠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부리며 말보다는 몸을 들이밀던 A.

B는 늘 화가 올라있었다. p에 오면 ‘누구라도 건드려라, 나 오늘 누구라도 치고 싶은 사람이야’라고 얼굴에 쓰인 듯 행동했다. 돌피(돌아다니면서 하는 피구)를 할 때도 이기기 위해서 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치고 싶어서, 때리고 싶어서 공을 던진다는 아이였다. 추운 날씨든, 더운 날씨든, B의 어깨에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1시간을 쉼없이 달리면 뭔가 풀어질만도 한데, 그렇게 달린 후엔 오히려 감정이 더 올라 있었다. 그렇게 찰랑이는 감정의 선을 나는 늘 따라다녔다. 누구를 때릴까봐, 이유없이 사고를 칠까봐,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생길까봐, 아슬아슬했다.

B의 감정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했다. 웃음과 화의 경계가 아슬아슬했다. 그러던 B가 며칠 전부터 100킬로미터씩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돌피를 하면서도 춤을 추고, 특유의 개그를 하면서 나를 웃겼다. “야, 너 없으면 보고 싶어 어쩌니, 너 졸업하고도 좀 와라. 너 없으면 웃을 일이 없겠어” 나는 껄껄껄 웃으며 B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오늘을 보기 위해 우리는 6년을 기다렸을까.  

K는 어려운 소설과 책을 읽는 초등학생이다. 내가 봐도 어려운 책들을 주로 읽었다.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해 부담스러운 아이다. ‘나는 그 책 안읽었는데’라고 하면 그것도 안 읽고 뭐했냐는 투로 투덜댄다. K는 늘 투덜댔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다.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기획을 할 때 머리 속에 K가 떠나질 않았다. K가 뭐라고 할까, 또 뭐라고 투덜댈까. 한마디로 내가 가장 눈치를 많이 봤던 아이다. 눈치를 가장 많이 봤는데 성과는 좋았냐하면 백이면 백 모두 졌다. 겉으로는 그렇다. 속으로 K가 뭘 더 좋아했는지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다. p가 싫다면서, 집에 가라고 하면 가지도 않고 교사 옆에서 계속 투덜대던 K. 졸업하면 한동안 내 귓가에선 K의 음성이 들릴 것 같다. K는 누구에게 또 투덜대고 있을까.  

T와는 깊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걸 잘하는 T. 엄마, 아빠에 대한 이야기, 친구이야기, 자기 이야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T는 생각을 말로 잘 풀어내는 아이였다. 그리고, 걱정이 많은 아이였다. 걱정이 많아서 이야기도 많고 말도 많아졌다. 이래도 되는지, 저래도 되는지, 나는 왜 그러는지 늘 설명하고 싶어했다. T의 설명에 나는 ‘이건 어떠니?, 이렇게 해보지 그래?, 그건 이래서 그럴꺼야’등의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늘 T는 T의 생각에 따르는 듯 했지만, 나의 말을 오래동안 기억하고 누구와 싸울 때 한마디씩 덧붙이는 말로 쓰곤 했다. T의 걱정을 더는 한마디가 되곤 했다.

오늘은 아이들의 졸업장을 써볼 생각이다. A, B, K, T...그리고 또....졸업장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건 쓰다보면 떠오르는 추억이 너무 많아서이다. 그 추억들을 더듬어 가다보면 진도는 나가지 않고 시간만 훅 간다. 때로 눈물만 흐른다. 졸업장 진도에 일도 도움 안되는 눙울물 말이다.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눙울물일랑 버리고, 예쁜 졸업장 한번 써봐야지. 그리고, 기억하고 싶다. 언젠가 시간도 기억도 잃어버리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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