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존재를 고정하지 않는다’

-홍승은<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를 읽고.

by 붉은낙타




토요일 아침이었다. D에게서 전화가 왔다. ‘웬일일까’ 전화를 받았다. ‘어제 **이 가방을 두고 와서요. 보셨어요?’ ‘아, 못 봤는데’ ‘**한테 부탁했었었는데, 센터 비번 좀 알려주세요. **가 가져다 뒀을 것 같아요’ ‘아, 알았어~’ 나는 전화를 얼른 끊고, 필요하다는 비번을 문자로 넣어주었다. 그렇게 급하게 비번을 넣고 나니 그제야 어제의 D가 생각난다. 나는 어제 D를 오랜만에 만났다. 만나서 행사 치르고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얘기도 잘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제서야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지내는지, 일하는 곳은 어떤지, 집은 언제 올 건지, 어제 사람들은 잘 만났는지, 몸은 어떤지’ 이래 저래 궁금해졌다. 문자를 할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늘 이런 식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정작 헤어지면 아쉬워할 때가 많다. 나 혼자서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그만둔다. 사람들을 만나서 차근차근 천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나누는 이들이 참 부럽다. 나는 왜 면전에서는 생각나지 않다가 헤어지면 아쉽고 후회되는지 모르겠다. 글을 쓰다가 이런 내가 ‘사람에 대해 세심하게 마음을 쓰지 않아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관심과 표현이 서툴러서일 수도 있지만 표현 이전에 ‘나는 어디에 마음을 쓰고 있나’ 궁금했다.

글을 쓴다는 것- 나를 들춰본다는 것.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 사회복지사, 교사, 여성, 엄마, 아이들, 일동, 우리동네, 방과 후,.... 홍승은 님의 말처럼 ‘나를 이루는 몇 가지 정보가 마치 나의 전부인 듯 판단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럴까. 나는 나의 생각(마음)을 알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누군가가 알기는 어렵다. 그리고, 몇 가지 정보로 나를 규정할 수 없고, 규정해서도 안된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잊고 있었던 감정과 의식, 기억으로 나와 교류한다. 책에서 인용된 태연님 말처럼 ‘순간을 기록하며 내 일상과 감각에 권위를 준다. 글을 통해 감정을 배운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중략) 어떤 글은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중략) 글쓰기에서 가치판단이 적용되는 기준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글, 고유한 개개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개는 글은 위험하다. 나의 첫 글쓰기는 위험했다.(중략) 페미니즘의 언어는 몸에 밴 수치심을 의심하고, 에두르지 않고 솔직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왔다. 망설여질 때마다 수치는 나의 것이 아니며, 내 문제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는 말을 곱씹었다.-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p7~11

상황을 뭉뚱그리지 않아야- 문장력 이전의 서사와 질문

2018년 6월 6일 나의 페북 담벼락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런 글이 참 좋다. 사는 모습 구석구석 예민하게 담아낸 글. 그저 겉만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나를 인식하게 하는 글. 만나본 적은 없지만 참 친절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처음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좀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생각이 난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고 난 그때 나의 느낌. 그래, 그 책을 읽고 나도 누군가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다시 그때 생각이 나서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지난 책이 따뜻함으로 다가왔다면, 이번 책은 자꾸 ‘들춰보게’ 한다. 들춰보고는 지난 나의 글을 다시 쓰게 한다. ‘상황을 뭉뚱그려’ 한두 줄로 쓴 지난 나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홍승은 님이 어머님과 했다는 15분 글쓰기 이야기를 읽으며 ‘나와 또 다른 누군가’를 대입시켜 상상해본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당연히 가만히 안아줄 수 있어. 그런데 솔직히 궁금해. 어떤 순간에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자세히 말해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형식적으로 위로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으니까, 더 되묻게 되는 것 같아. 조금 더 진심으로 다가가고 싶어서.”(중략) 상황을 뭉뚱그리지 않아야 나도 글을 쓰면서 그때의 나와 타자를 이해하거나, 위로하거나, 정확한 대상을 향해 분노할 수 있어요. (중략)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머리로 상황을 해석하고 감상을 적는 쓰기의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써보는 게 시작이다.(중략) 나는 글의 고유성과 힘은 문장력 이전에 서사와 질문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내가 통과해 온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기에 내 이야기를 쓸 때 글은 가장 고유해진다. (중략) 추상적인 글의 가장 큰 한계는 구체적인 맥락이 없어 여러 사람에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책 p116~117

한번 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이라도 쓰는 과정을 거쳤으니 말이다.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잘 기억나지 않았던 나의 이를 억지로 손을 집어 넣어 토해내기만 했구나라고. 한 번이 아니라 쓰고 또 써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두 번째 쳅터를 읽고 나는 잠시 멈췄었다. 그리고 나의 글을 다시 썼다. 그래, 천천히 나를 쓰다듬으며 기다리며. 나도 기억 해내 보려 한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 여전히 두렵고,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가 부끄럽다. 그동안 나의 글쓰기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싫은 사람 하나 어떻게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내 ‘글에 숨이 붙’으면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들춰준다. 내가 들춰보게 된다. 홍승은 님의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 감사하며, 누구나 그런 자기만의 방을 가지길. 최소한 어느 누구보다 ‘내’가 그러길 나는 빈다.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가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탈출하여 인간을 서로에 대한 관계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관련하여 본다면, 그리고 하늘이건 나무이건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사물 그 자체로 보게 된다면’- 같은 책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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