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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Aug 04. 2020

내가 훔쳐본 나의 얼굴



“매번 멍한 얼굴이었잖아. 걔가 깽판을 치게 내버려뒀잖아. 남자애들끼리 방을 만들었을 때 초대를 수락했잖아. 뛰쳐나온 적 없다고. 너. 다른 애들이 알려줄 때 너는 아무것도 안 했어. 김도영은 원래 그런 새끼지만…….아, 못 봤다고? 산에 있었다고? 그렇다 치자. 그냥, 나는 지난 몇 년간 너희랑 이 좁고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있었던 게 너무.....더러워. 더러워 죽겠어.”-<시선으로부터> p173

가끔 내 얼굴을 훔쳐볼 때가 있다. 보려고 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보았을 때, 나의 눈에 보였을 때. 그때의 기억은 대부분 낯설고 당황스럽다. 내가 생각하는 표정이 아니다. 얼굴 모양이야 내가 아는 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얼굴의 표정은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의 표정, 껍데기일 때가 있다. 거기에 더하여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너 누구야!’

소설 속에서 이 문장을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내가 훔쳐본 나의 얼굴’이었다. ‘멍한 얼굴’에서 나아가 경직되어 있다. 감정이 스며들지 않은 얼굴, 감정을 밀어낸 얼굴. 나는 언제 이런 얼굴일까. 대체로 힘들 때이다. 외면하고 싶을 때, 싫을 때, 그 속에서 나를 지킬 때. 나는 나를 지켰나. 나를 지킨답시고 무표정해지는 멍한 내가 싫었다.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내가 싫었다.  

x를 볼 때도 종종 이런 표정이었다. 이 세계에 있지 않고 싶었을까. 분명한 건 세계와 나 사이에서 어찌해야할지 방법을 몰랐다는 거다. 자동적인 자기방어. t도 그랬지. 나 또한 자동적인 자기방어에 익숙한 사람이다. 표정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꺼져’ ‘난 너에게 관심 없어’ ‘난 아무 생각없어’ ‘난 몰라’ 생각이 없는 것은 실로 명상의 입구로 갈 수 있는 시간인데, 생각과 말의 소통이 일어나야하는 현실에서 이 간극은 감정으로 상처로 다가간다. 표현을 해야할 때, 적절한 소통의 때를 외면하기 때문일까.

소설 속의 친구는 나중에 알려주었다. ‘무마시키는 미소였다고, 도영보다도 꼴 보기 싫었다고’ 얼마 전 읽은 칼럼 ‘천진난만함이 꼴 보기 싫어’속 천진난만함이 뭘 모르는 미소였다면, 멍한 표정은 뭘 아는 미소일까? 알아서 멍함을 선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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