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지에서 만난 사람들- 미소와 찬실이

- 소공녀와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고

by 붉은낙타



“솔직히 요즘 집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르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잠시 집을 나왔지.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인가”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45,000원 일당을 받는다. 그 돈으로 하루를 산다. 담배를 사고 위스키를 마시고 한솔과 논다. 입김이 나는 추위와 벗어도 벗어도 다 벗지 못하는 옷 때문에 오늘의 섹스는 내년 봄으로 미루지만, 미소는 ‘그냥’ 괜찮다. 2014년에서 2015년이 되면서 담뱃값이 2천 원 오르고, 방값도 오르면서 미소는 집을 나온다. 대학 때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들 집을 전전한다. 나는 전전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미소가 안다면 ‘그건 아니야’ 했을 것이다. 돈이 없어 집을 빼기는 했지만 그동안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그저 ‘보러’ 다닌 것이다. 그 친구들 중 나도 있을까.

“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일한 사람도 몰라”

찬실이는 영화 프로듀서다. pd가 뭐냐고 묻는 물음에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찬실은 한 감독과 오래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죽으면서(영화를 보고 난 후에 알았는데 이 영화감독인 김초희 감독은 ‘홍상수 사단’으로 홍상수 감독과 주욱 일을 해왔고 오랫동안 pd를 했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다. 오래 동안 영화 일만 하면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이 살았던 찬실이는 서울에서 있을 것 같지 않은 언덕길 집으로 이사를 하고, 친하게 지내던 소피의 가사도우미로 일한다.

미소는 매력 있다.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자기 일을 하고 정당하게 받은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에 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담배를 피우면서 자기 재떨이는 철저하게 지키는 프로다. 난 미소만큼 멋있는 애연가를 만난 적이 없다. 찬실이는 영화 내내 귀엽다.(난 귀여움이란 감정은 우주 최초의 사랑의 감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인생의 나락인데 그 나락에서도 처음 공부하는 학생처럼 호기심 대왕이다. 나락에서도 진지하다. 솔직하다. 욕망의 질문에 영화 보는 사람 손 오글거리게 솔직함을 숨길 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이 두 사람을 만나고 난 나는 휴가 내내 개운치 않다. 집 하나 없이 떠도는 미소가 아무렇지도 않은 게 마음에 들지 않고, 몇십 년 마음과 몸을 쏟은 영화 일을 하루아침에 못하게 된 찬실이가 복도 많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의 그 불편함 때문에 그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삼지 않은 미소와 찬실이를 보는 게 괜찮지 않았다. “너네는 정말 괜찮은 거야? 얘들은 정말 누구지? 나는?”

영화를 보기 전 나는 정신이 맑았다. 어떤 잠 오는 영화라도 집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컨디션이었다. 집은 조용했고 영화를 집중하기에 딱이었다. 나의 머리를 비꼬는 어떤 복잡한 스릴러도, 나의 눈꺼풀을 내려앉게 할 어떤 영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진지체였다. 그러나 나의 진지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깨어졌다. 미소와 찬실이가 나에게 말했다. “삶은 그렇게 진지한 게 아니잖아? 왜 그렇게 진지한 척하는 거야? 너도 참....... 얘, 못 말리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난 ‘왜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떠나지는 않았다. 휴가지에서 미소와 찬실이가 준 질문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 미소와 찬실이가 괜찮았던 게 혹은 이미 그들이 넘어왔을, 넘고 있을 언덕이 나는 아직이다. 무엇보다 지금 나는 괜찮치 않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미소와 찬실이도 그랬다. 미소에게는 담배와 위스키가 필요했다. 세수와 머리감기를 공중화장실 세면대에서 하고 엉거주춤하게 앉아 핸드드라이어에 머리카락을 말리면서도 미소에게는 한 잔의 위스키가 필요했다. 남들에게는 “너도 참 염치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미소는 ‘이게 왜 안되지?’ 의문표를 찍었다. 가사도우미를 하며 장을 보다 만난 영화 제작자는 찬실이에게 당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찬실은 “왜 그게 안 되는데요? 잘 모르겠는데요” 마치, 초등학생처럼 질문한다. 나에게 여전한 것이 미소와 찬실에게도 여전하다.

다만, 미소와 찬실의 의문표에는 분노가 없다. 미소는 밴드를 함께 했던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잠을 재워달라고 한다. 그들에게 미소는 어떻게 했나. 자신은 필요 없다는 제작자를 뒤로 하고 돌아온 찬실이는 어땠나. 특유의 그 초등학생 같은 표정으로 할머니 한글 공부를 도와주고 빤스에 긴 유짜 러닝을 걸친 추억의 그를 만난다. 테이프 카셋을 눌러 처음 자기가 이끌렸던 목소리를 듣는다. 신파일 것 같은 찬실이의 순간순간은 1학년 받아쓰기 시험지처럼 꼭꼭 눌러쓴 순간순간으로 채워간다. 20점짜리 현재일지라도 말이다.

찬실이는 20점짜리 받아쓰기 실력에도 꼭꼭 눌러쓸 수 있는 정성을 들일 줄 안다. 찬실이의 어눌하지만 또박또박한 말투(쓰고 보니 이상하네? 그렇지만, 패스), 미소의 사랑스러운 눈빛이 나에게도 말을 건다. 분노하지 않는 그들이 불편한 나에게 자꾸만 말을 건다. 뭐라는 거야? 도대체 나는 뭔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웬만큼 괜찮은 친구들인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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