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붉은낙타 Nov 24. 2020

정리



퇴근 후 자정 가까이 거실과 옷방의 가구를 옮기고 쏟아져나온 짐 정리를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간간히 힘들어 앉았다, 정리가 끝날 즈음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잠이 쏟아졌다. 위치를 바꾸고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주방 때문이다. 씽크대가 내려앉는 걸 발견한지 한달이 지난 것 같다. 바꿔야지 생각만 하다가 최근 견적을 받았고 씽크대를 바꾸려고 보니 평소에 깝깝했던 구조도 바꾸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나무장 하나를 옮겨야 했다. 그 나무장을 옮기기 위해 옷방의 가구를 옮기기로 했다.

우리 집에는 나무로 된 장이 몇 개있다. p가 만든것도 있고, k가 만든것도 있고 어디서 가져온 것도 있고, 내가 산 것도 있다. 오늘 옮기기로 한 ‘나무로 된 정리장’은 아이들을 한창 키울 때 내가 샀던 것이다. 아이들 물건으로 여기 저기 정리가 되지 않던 때 아이들 물건 혹은 옷을 넣으려고 샀다. 12칸으로 나누어진 나무장은 요즘 인기있는 어느 브랜드 제품을 나무로 바꾸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플라스틱으로 된 실용적인 것도 많은데 나는 뭐 하러 저 무거운 원목 나무장을 샀을까. 재료를 원목으로 골랐을 때는 아이들 건강과 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목표를 이루었나. 첫아이를 키우던 나는 경험은 없었고 하나하나 조심스러웠다. 아이 몸에 좋지 않은 것, 환경에 좋지 않은 건 강박적으로, 감정적으로 하고 싶지 않았던 때였다.  

나무장은 겉으로 보기엔 디자인도 좋고 칸칸 수납도 꽤 실용적이라 건강과 환경과 실용 모두의 가치를 가졌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나무장은 칸칸히 나누어져 있었지만 나의 일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모든게 뒤섞여있었고 어떻게 할지 방법을 잘 몰랐다. 주변에 도움도 청했고 p와 함께 노력했지만 하루 하루 반복되는 현실과 조금 나아졌나 싶으면 다시 제자리 걸음인 일상 때문에 힘들었다. 그때 내 일상은 나의 욕구와는 정반대로 정리되지 않을 일상이었다. 당시에 산 물건 중에 칸칸이 나누어 정리하는 수납물건이 몇 개 더 있다. 머리 속은 질서와 체계를 요구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나의 삶이 나를 힘들게 했던 때 였다. 조금이라도 나누고, 분류하고, 질서에 맞추어 살고 싶었다.

경험이 없었고, 화낼 줄 몰랐고, 아이도 못 키우면서, 남편은 바꿀 수 있을거라는 영웅적인 착각에 빠졌던 나는 정리가 잘 되었어야 유용했던 정리함을 혼자서 끌어앉고 10여년을 살았다.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곳에 넣고 꺼내쓰기 위해서는 내가, 내 삶의 구조가 바뀌어야하는 것을. 당장의 깝깝했던 지난 날의 내 욕구가 피부로 느껴져 ‘나는 내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혼자서 바등대고 어쨌든 해결하고 싶어 정리하고 앉았던 지난 날의 내가 되살아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살면서 정리를 참 많이도 했다. 옷정리, 아이들 학용품 정리, 주방정리, 신발정리,..........개뿔, 도대체 난 뭘 정리 한거야.

애초에 내 생각은 나무 정리장을 거실로 빼고 b가 자기 방으로 쓰던 다른 나무장을 옷방으로 넣으려고 했다. 근데 c가 버리면 어떻겠냐고 한다. 그래, 버리면 될 것을. 쉽지는 않았지만, 정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무장을 밑으로 내렸고, 옷방의 책꽃이 두 개도 버리기로 하고 밑으로 내렸다. 가구 3개를 버리고 정리되지 못한 내 옷들을 큰방 옷장에 우선 넣었다. 처음 옮기기로 한 정리장도 제자리를 찾았다. 거실의 책꽂이는 위치를 바꾸었고 그 덕에 옷방에는 b의 한뼘 자기방이 생겼다. 스탠드가 켜진 한뼘 공간을 본 아이들은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k와 c가 입을 모아 말한다.
“뭐야, 이제까지 b방 만들어줄려고 우리가 이 고생을 한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에 대한 기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