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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 Nov 25. 2022

내 짝꿍

서로 다른 우리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이 아파트를 분양받아 전학을 가게 됐다. 새집에 비해 전학 간 학교는 여러모로 마뜩잖았다. 광복되자마자 지었다는 학교는 운동장은 컸지만 오랜 역사만큼이나 건물은 너무 낡고 후져 보였다. 그 위에 덧대 칠한 쨍한 연두색 페인트는 마냥 촌스러웠다. 건물 맞은편에 운동장 둘레를 삥 둘러 높은 계단이 있었는데 계단 위로 나무들이 울창했다. 지금이라면 운치 있다 했겠지만 당시에는 그늘을 드리운 빽빽한 수풀 안에서 뭐라도 나올 거 같아 혼자서는 그곳으로 잘 안 갔었다. 친구들도 보고 싶고 아기자기한 이전의 학교가 떠올라 전학 간 학교에 한동안 정을 못 붙였다.


  마음에 드는 점도 있긴 했다. 5학년과 6학년 모두 1반으로 배정됐는데 담임선생님들이 학년부장이셨다. 두 분 모두 업무가 많은 만큼 우리에게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특히 6학년 때는 수업 시간에 쉬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님은 자습을 시키거나 교실에 아이들이 있으면 소란스럽다고 우리를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의 절반은 의무적으로 놀아야 했으니 살 판 났다 싶었다. 아침에 엄마가 깨우면 학교에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눈이 번쩍 떠졌다.




  6학년 때는 격주로 짝을 바꿨다. 한 주는 남학생이, 그다음에는 여학생이 제비뽑기를 해서  뽑은 반 번호에 해당하는 이성 친구의 자리 옆으로 가서 앉을 수 있었다. 한참 이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나이였다. 짝 바꾸는 날이면 교실은 긴장과 설렘을 가득 담은 공기로 물결치는 느낌이었다. 다들 들뜬 모습이었지만 각자 다른 속도로 쪽지를 열어보고는 또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같은 짝이 여러 번 되는 경우도 있었고 마음에 안 드는 짝과 이 주일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언젠가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던 반장이 짝이 바뀌고 나서 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게 됐다. 짝이 된 여자 아이가 발달 장애를 갖고 있어서 수업 시간에 색종이만 오리거나 혼자 떠들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었다. 남자아이들이 가장 꺼리는 짝이었다. 나는 반장이랑 친했었는데 평소 남자다운 척을 꽤나 하던 녀석이 그런 일로 울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2학기의 어느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짝 바꾸는 시간이 되어 교실이 한참 어수선했다. 번호를 뽑고 보려는 찰나, 단짝이었던 친구가 내 쪽지를 낚아챘다. 친구는 씩 웃으며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나를 어느 자리로 밀쳐 앉혔다. 엉덩방아 찧듯 앉고 보니 주변 아이들이 키득대고 있었다. 짝이 된 아이는 야구 모자를 한껏 눌러쓰고 고개를 내 반대편으로 돌리고 엎드려 있었다. 그 바람에 빨개진 귀만 보였다. 나중에 영문을 들어보니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소문이 나서 내 친구의 귀에 들어갔다고 했다. 큐피드가 되겠다는 오지랖을 부려 내 쪽지를 바꿨다는 얘기를 친구는 뭐가 좋은지 계속 실실 웃으며 전했다. 첫날은 말 한마디도 못하고 지나갔지만 이주 간 우리는 잘 지냈다.



 

 나는 그 아이와 짝이 되기 전까지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나서길 좋아하던 나와 다르게 그 아이는 교실에서는 늘 조용한 편이었다. 수학 시간에 모르는 문제를 알려주면 별말 없이 수줍은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당시 반 대항 축구경기에 남자애들이 열을 올리던 때라 그 애도 시간만 나면 축구를 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얼룩덜룩 그을린 얼굴에 먼지가 뒤섞인 땀을 흘리며 자리에 앉곤 했다.

 


  

  한 번은 같은 반 남자애가 어쩐 일인지 소변을 참다가 실수를 한 적이 있다. 6학년 교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어서 다들 당혹스러워했고, 가뜩이나 왜소하고 소심한 친구는 울먹이며 더욱 작아졌다. 그때 내 짝이 움츠리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못 드는 친구에게 괜찮으냐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 바지를 덮어 주고 대걸레를 가져와 닦기 시작했다. 그때에서야 주변에 있던 나와 다른 친구들도 부랴부랴 같이 도왔다. 선뜻 나서 준 그 아이가 참 고맙고 든든했다. 이후에는 꽤 친해져서 같이 어울려 놀았다. 가끔 그 아이에게 초콜릿이나 크리스마스 카드 등을 받으면 설레기도 했었다. 아쉽게도 다시 짝이 되는 행운은 없었고 중학교도 서로 동떨어진 학교로 배정받았다. 같은 동네이니 자주 보리라는 기대와 달리 졸업 후에도 좀처럼 마주칠 기회가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보게 돼도 만원인 통학 버스에 밀려 먼발치에서 긴가민가하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결국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6학년 때의 일들은 싱그럽고 풋풋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됐다.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버스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며 다음날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예전의 수줍던 소년은 어느새 자신감 넘치고 넉살 좋은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쑥스러워 묻는 말에 겨우 대답만 하다 돌아오는데 6학년 그 교실의 일렁이던 공기로 가슴이 가득 차는 듯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8년간의 뜨겁고 요란한 연애를 하고 15년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살면서 추억이 추억으로 끝났더라면 더 아름다웠겠다 싶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둘을 골고루 나눠 닮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연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가 그때 바꿔치기한 쪽지가 오늘의 출발점이 되리란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주인의 취향과 시간이 찻물과 함께 새겨진 오래된 찻잔에 정감이 간다. 티끌도 허용하지 않던 광택은 바래지만 감성이 더해진 느낌이 더없이 좋다. 남편과 나의 관계도 찻잔처럼 계속 변하고 있다. 친구, 연인, 반려의 길을 함께하는 모습 모두 흠 없이 완벽하진 않았다. 그래도 지난 시간을 돌이킬 때마다 웃음이 머금어지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싶다. 둘째를 낳던 날 남편이 이제 우리 가족은 완전체라고 했다. 가슴 두근대는 열정은 아련하지만 우리 ‘완전체’의 앞날에 대한 기대는 나를 다시 설레게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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