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식도락

변절자의 고백

애증의 라면

by 하우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나간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소원이가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자는데……

안 되는 거 알잖아.

마저 듣지도 않고 말을 잘랐다.

편의점에서 먹는 컵라면.

딸의 요 근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자 우리 부부가 싫어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아이가 노래를 불러서인지 편의점 앞 테이블에 라면 먹는 검은색 패딩 무리들이 자주 보인다. 라면 용기가 뿜는 김에 입김이 뒤섞인 가운데 옹색하게 면발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아이들이 먹고 난 주변은 얼마나 어지럽던지. 뜨거운 물도 염려스럽지만 내 아이로 인해 타인의 고단한 일과에 수고로움이 더해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보다 라면은 우리집에서는 불량식품 취급을 받는 음식이다. 어린이날이나 연말처럼 하고 싶은 것을 대부분 허용해 주는 날에만 먹는 것이 공식적인 약속이다. 물론 그것보다 자주 먹게 되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안 먹이고 있다.




아이가 생기고 음식에 강박적인 면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요리에 대해 잘 모르기에 매뉴얼을 곧이곧대로 따랐던 것 같다.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의 줄 세우기가 시작됐다. 유기농을 고집하고 간식까지 만들어 먹였다. 딱 첫애 때까지 그랬다. 둘째를 낳고는 돌 이후 봉인 해제되어 6살 아들은 초등학생처럼 먹지만 그럼에도 라면과 탄산음료 불가의 마지노선은 있다.



인스턴트에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라면 덕후이다. 편의점 가판에서 신제품을 발견하면 들뜬 마음으로 부리나케 품고 온다. 첫 시식은 정량의 물과 불 세기, 조리 시간을 지켜야 하며 부재료는 넣지 않는다. 온전한 그대로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국물베이스의 풍미, 맛의 조화, 면발의 굵기나 탄력에 대한 맛평가는 섬세하며 엄중하다.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지만 라면들마다 특색이 달라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라면을 고른다. 번들보다는 한두 개씩 골고루 구매하는 편이다.


한때는 하루에 한 번은 라면을 먹었다. 주변에서 말려서 그렇지 두 끼 이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도 건강에 안 좋다고 해서 여러 재료를 섞어 라면 수프를 만들어 본 적도 있다.

유투버나 검색창에 이름만 쳐도 레시피들이 줄지어 나오는 유명 요리 연구가의 ‘맛있게 라면 끓이는 법’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면발을 한차례 끓여 건져냈다 육수를 만든 후에 토렴 하거나 쌈장이나 멸치액젓을 넣기도 했다. 라면 봉지 뒤의 조리법이 최고라는 결론을 얻기까지 여러 창의적인 시도가 있었다.

기본 조리법을 고수하되 해물 라면에 달걀을 안 넣는다거나 달걀을 풀어서 넣는 것과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넣는 것을 구분하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문어나 꽃게 등의 해산물에 양파, 콩나물을 넣어 풍성하게 즐길 때도 있다.


라면이 소울푸드라면 우습지만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을 때는 만만하니 라면만 한 게 없었다. 퇴근길에 스코빌지수(매운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가 높은 라면을 사 와서 청양고추를 잔뜩 때려 넣고 혀와 위장에 화풀이했다. 예민한 장 탓에 다음날 힘들어도 변기에 화까지 같이 배설되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1교시 전에 자습과 보충수업이 있었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매점에 뛰어 내려가 한결같이 나는 튀김우동을, 친구는 새우탕을 들이마시고 조례가 시작되기 전 교실로 들어왔다. 한 번은 담임선생님께 걸려 친구와 컵라면을 들고 매점 주변을 뱅뱅 돌며 도망 다니기도 했지만 모닝 라면은 새벽잠을 깨우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라면을 사랑하고 그간 많은 위로를 받았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최대한 늦게 친해지게 하고 싶다. 좋은 것을 많이 먹여 건강한 입맛을 가진 후에 가끔 별식으로 즐겼으면 하는 게 엄마의 바람이다. 하지 말라고 하고 나만 먹을 수는 없으니 예전에 비해 먹는 횟수가 줄었고 애들 앞에서는 먹지 않는다.



죽고 못 살아도 입맛이든 관계든 변하기 마련이다. 맡은 역할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고2 때 새우탕을 들고 같이 뛰었던 친구는 훗날 놀러 간 자기 아들에게 아이 친구 엄마가 간식으로 라면 따위를 끓여줬다며 화를 냈다.



* 두 번째 사진 출처 : 구글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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