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바짝 차려야 버틸 수 있다.
12월, 설레는 첫 출근을 뒤로하고 새해 1월이 오기 전까지 회계 사무실에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고, 민폐만 될 것 같습니다. 빨리 그만두는 게 회사를 위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나 수십 번 고민하고 상상했다. 퇴사를 이야기한 후 상황들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끊임없이 돌렸다. 이직을 더 알아보고 갈 곳이 없다면 다시 파견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내 성격은 무언가를 결정하면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경력을 쌓겠다는 가장 큰 목표가 있었기에 버텨보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새해의 시작은 다가올 12개월을 기대하며 버킷 리스트도 작성하고 목표도 설정하며 좀 더 발전한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시간들을 보냈었다. 다이어리를 꽉꽉 채워 쓰진 않아도 스스로에게 주는 새해 선물로 챙겨 왔었고, 지인들을 만나 새해 인사를 전하는 여유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랬던 내가 1월이 다가오는 시간을 두려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중학교 1학년의 새로운 시작을 앞둔 외동딸을 위해 엄마로서의 계획들도 세워야 했지만 그럴 여유는 사치였다.
경험도 해보지 못한 업무에 대해 월별 정리하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생각했다. 과연 '한 사람이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인가'. 실수의 두려움과 무지에서 오는 막막함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특히 1월부터 5월까지는 개인의 일상적 생활은 포기해야 버틸 수 있는 상황들이 펼쳐짐을 예고했다. 오죽하면 중학교의 새 교복을 맞출 시간조차 겨우 뺐을 정도였으니까.
하... 깊은 한숨과 막막함이란 이런 것일까.
44년을 살아오며 이토록 '낯선 봄'은 처음이었다.
전임자는 없었고 인수인계서도 당연히 없었다. 회계 사무실의 업종 특성상 모든 업체에 대한 인수인계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라 했다. 또한 담당자마다 업무 스타일이 모두 다르기에 어떤 기준으로 써야 할지 모호하다고 했다. 법인회사에서 오랜 기간 근무 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업종의 특성상 인수인계서가 없는 게 당연하고, 업무를 해내고 싶다면 알아서 거래처를 파악하고 업종 및 각각의 특이사항을 익히라는 말이 다였다. 나는 까라면 까야하는 신입이니까.(경험한 것만 알기에 모든 회계 사무실이 이렇다는 건 아님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모니터 앞에 앉으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고 거래처 파일을 봐도 어찌 비교를 하며 어떻게 파악을 해야 하는지 몰라 막막했다. 낯선 [더존] 프로그램도 써야 했다. 기본적인 입력은 할 수 있었으나 프로그램의 프로세스를 모르니 어떤 루트로 돌아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예를 들면 부가세 신고 시 어디서 어떻게 입력을 하고, 입력한 사항들은 어디서 확인하는지. 그에 따른 부속 명세서는 어찌 작성하는지. 어떤 신고서가 한 세트로 묶이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맨바닥에 헤딩하듯 업무를 해야만 했다. 산속 야간 운전하는데 라이트가 다 박살 나서 빛 하나 없이 운전하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무지하면 겁이 없다 했지만 겁이 났다. 겁이 난들 어찌하리. 신고 마감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법인 회사에서 10년 넘도록 세무 대리인과 함께 협업하며 일할 땐 미처 몰랐다. 회계 사무실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지속되어 왔던 관례를... 그리고 회계 사무실만의 묵직하고 숨 가쁜 분위기는 신입인 나에겐 터져버릴 것 같은 업무량 보다 더한 막막함이었다.
여기서 잠시 회계 사무실의 상반기 굵직한 신고 프로세스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월, 원천세 반기 신고와 부가세 확정 신고가 있다.
2월, 면세 사업장 현황신고와 연말정산을 준비하고 각종 소득 지급명세서를 제출한다.
3월, 지옥의 법인세가 기다리고 있다.
4월, 숨 돌릴 틈이 잠깐 생긴다! 바로 부가세 예정신고다.
5월, 두 번째 지옥의 종소세 신고가 있다.
6월, 개인 중에서 성실 신고분이 남았다.
7월, 다시 원천세 반기 신고와 부가세 확정 신고가 있다.
위에 신고들을 처리함과 동시에 거래처 요청사항과 매달 신고하는 일들까지 해내야 한다. 이렇게 1월~7월까지 숨 돌릴 틈이 없다. 진짜 숨이 턱턱 막혔다. 모든 신고들은 각각 마감일이 있고 사장님들에게는 마감일 전에 '신고 상황 전달과 신고서 및 납부서' 전달까지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정작 세무 대리인은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간다. 그리고 하반기... 죽어가던 체력을 다시 끌어올려야 하는 이런 패턴으로 1년이 마무리된다.
신입 세무 대리인이 되어서야 세무 대리인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다. 법인회사에서 일할 때는 내가 맡은 회사 한 곳만 신경 쓰면 되었다. 내가 직접 세무 대리인이 되어 맡은 회사들은 법인, 개인, 면세 사업장까지 수십 군데... 업종도 업태도 가지각색. 닥친 일을 쳐내기도 바쁜데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니 잠잘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업무 과부하 탓인지 다음날이면 공부한 게 기억나지 않아 백지로 돌아갔다. 거기에 더해 실수라도 하거나 모르는 것을 어렵게 질문하면 사무장에게 혼이 나듯 일을 배우고 고쳐나가야 했다. 물론 사무장 입장에서는 교육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삐뚤어진 건지 알려주는 방식도 말투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바쁜 스케줄로 인해 머리도 제대로 못 감고 잠도 부족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날 서고 예민해진 탓이었을 것이다.
일의 순서도 모른 채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판단도 서지 않은 상태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치웠다. 새벽이 가까워지는 날은 수두룩했고, 주말도 없이 몇 달을 달렸다. 어느새 눈이 녹고 계절을 느낄 정신도 없이 새싹이 움트는 봄을 지나 6월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감각을 잊은 채 44살 봄이 통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경력을 쌓을 만한 일을 했느냐?
속절없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은 없었다. 최저임금에 연차도 없는 근무 조건이었지만 법인, 개인 모두 우여곡절 끝에 상반기 신고를 마무리했다. 내가 맡은 회사가 족히 법인과 개인을 합쳐 70군데가 넘는다.(부동산 임대 및 신고대리는 제외) 얄팍하게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하고 챗지피티와 세무 관련 책을 읽어가며 신고를 미친 듯 쳐내며 쌓인 경험이 내 자산이 되었다. 일반 회사에서의 그나마 경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예 무경력 쌩 초보 신입이라면 '마음 단단히 먹고 일을 해야 할 곳'임은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정신수양의 측면도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티는 강한 정신력이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매일 자존심 깎이는 훈수와 훈계. 모르는 걸 알려준다는 명목하에 커져가던 목소리. 동료 A의 견제와 소통이 되지 않는 상하관계는 안 그래도 작은 나의 체형을 더욱 쭈그리로 만들었고 흰머리카락은 급속도로 퍼져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무장의 무게감이 얼마나 컸을지 이해는 하지만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신입이라도 모르는 게 잘못!'인 상황들에 경력을 쌓으려고 버티는 있는 게 과연 맞는 것인가 싶었다. 미련한 내가 너무 싫었다. 독하게 그만둔다고 말하지 못하는 매일이 한심해 순간순간 눈물이 흐르고 한숨이 흘러나와 내 몸을 집어삼켜버렸다. 내 영혼이 점차 말라 비틀어갔지만 그 안에서 독하게 버티는 정신머리가 단단해졌다(ing 진행 중)
파도가 일렁이는 망망대해에 혼자 떠있는 돛 단 배와 같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봄이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하지만 난 이 낯선 봄을 또 한 번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왜?" 퇴사를 포기하고 경력을 조금 더 쌓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토록 힘들다고 징징거리면서 왜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거냐고, 퇴사해도 회사는 잘 굴러가니 당신 의 정신건강부터 챙기라고 말할 것이다. 나의 선택을 한심하고 미련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선택에든 후회는 따르기에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조금 더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반 회사 신입 3개월은 회계 사무실 신입 1년 차라 감히 말하고 싶다. 어디 가서 '나 이 업무 했어요!!'라고 당당히 말하기도 부족하다. 큰 욕심은 없다. 부디 첫 경험보다 조금은 더 나은 봄이길 바랄 뿐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두 번, 세 번째 경험보다 힘들고 낯설기에 그 힘듦이 배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기대보다 오기와 독기로 가득 차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였나. 즐길 수 없는 인생도 있다는 걸 배웠으니! '피할 수 없으면 독기 품고 버텨보기로 결심'했다. 두렵지만 한편으론 기대감도 있다. 막막했던 낯선 봄이 두 번째 봄에선 어떤 느낌으로 지나가게 될지. 매일 퇴사를 꿈꾸지만 한 뼘 더 발전한 미래의 나를 위해 회계 사무실로 출근한다. 나처럼 후회와 선택의 갈림길에서 매일 힘들어하고 있다면 빠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린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 [퇴사 선택권]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이것만 기억해도 신입으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떨어지는 자존감을 조그이나마 챙길 수 있다. 오늘만 일할 것처럼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그렇게 매일이 모여 어느새 3개월 6개월 1년이 될 테니. 이런 경험들이 모여 우리 역시 매일 성장하는 경력자에 입문해 가고 있다는 걸 기억하며 스스로를 응원하길 바란다.
<상황을 바꾸는 마인드셋>
나는 아무것도 몰라! - 또 하나 알게 되었네!! 메모하고 기억해야지.
왜 나한테만 저러지? - 너도 얼마나 힘들면 이러겠니... 이 또한 지나가리.
내 상황을 이해 못 해? -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당당해지자!
* 신입의 어려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경력자들을 이해시키기보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생각의 루틴을 만들면 좋습니다. 신입의 뇌와 경력자의 뇌는 이미 뇌 구조가 다르거든요.
저도 경력자로 일해왔지만 신입이 되어보니 생각의 범위도 확장 영역도 다르더라고요. 이건 다음 주 연재에 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