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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신입 헬게이트 오픈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회사는 처음이었다.

by 세림

43세. 파견직으로 1년이 되어갈 때 즈음 다가올 44세가 걱정됐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가만히 숨만 셔도 나이는 한 살 더 먹어갈 테고, 지금 하는 일은 경력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더 버틸 것인가?], [새로운 회사로 이직할 것인가?]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파견직 근무였지만 회사 동료를 넘어선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젊은 MZ 청춘들과 일하면서 나 역시 43세가 아닌 33세처럼 마음만은 청춘으로 돌아갔다. 열정이 피어났고 매일 집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즐거운 나날이었다. 솔직하게 사춘기 딸과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기 시작할 때였기에 집보다 나를 인정해 주는 회사가 마음이 더 편했다. 하지만 좋다고 마냥 여기에 있을 순 없었다. 파견직이란 계약 종료기간에 언제든 회사에서 내쳐질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던가. 2년 후 과연 내가 이곳에서 재계약을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정규직 전환이 쉽지 않은 회사였고, 채용된 직원들의 평균 연령운 내 나이에 비해 청춘이었다. 오죽하면 팀장의 나이가 나보다 어렸으니 말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파견직 근무 1년 차를 앞둔 한 달 전, 잃어버린 경력을 다시 찾아보고자 사무직으로 재취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상과 같았던 어느 날 카톡의 친구 목록을 훑어보던 중 세무회계 사무소에서 일하는 지인의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운명이었을까) 이직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싶어 세무회계 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그 지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잘 지내시나요? 요즘 많이 바쁘시죠? 부가세 때문에?"


"당연하죠.... 요즘 어때요? 회사 다니세요? 혹시 같이 일 하실래요?"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지만 거두절미하고 부가세 신고기간에 아르바이트라도 해볼까 싶어 노크했던 카톡에 함께 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받은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정규직 전환이 불안했던 시기에 먼저 입사 권유를 해주는 곳이 어디 흔한가. 더군다나 물경력에 자격증 하나 없던 내가 세무회계 사무소에 취업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머릿속이 갑자기 어질러진 퍼즐을 맞춰야 하는 것처럼 복잡해졌다.


"아니... 저 진짜 회사 경력은 10년이 넘는데 너무 오래 셔서 물경력... 이라서요..."


"어차피 여기로 오면 경력 인정 못 받고 신입이에요."


"... 아 그렇겠죠??? 저도 경력 인정 해주는 것보다 그게 덜 부담스럽긴 해요..."


"회계사님께서 몇 년 전에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을 너무 좋게 보셔서... 같이 일하고 싶으면 함께해요. 이미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근데... 야근도 너무 힘들고... 신고 기간엔 주말도 출근해야 하잖아요?"


이직도 중요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확인해야 했다. 워킹맘인 내게 시간은 소분해서 아껴 써야 하는 존재인만큼 퇴근 후 아이와 가정을 보살펴야 하는 기혼녀가 회계사무소에서 일할 깜냥이 될까... 야근과 주말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신고기간엔 야근은 어쩔 수 없지만 전산이 잘되어 있어서 예전만큼 힘들진 않아요. 주말 근무도 하긴 해야 해요... 그래도 바쁜 시기 지나면 칼퇴근하고 자유로워요!"


"저 자격증도 없는데... 거기 가서 괜히 민폐만 될까 걱정돼요."


"에잇... 회계나 인사 쪽 근무만 10년이 넘는데 잘할 거예요. 금방 적응해요. 어려운 거 당연한 거고 신입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배우면서 일한다 생각해요. 월급도 최저임금이라 그건 감안해주셔야 해요."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신고기간은 어쩔 수 없겠구나. 철야에 주말근무도 있는데 임금은 최저 수준이고 야근수당도 연차도 없는 이곳에서 과연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회사를 고를 때 첫 번째 조건이 [칼퇴근] 두 번째 조건이 [연차]인지라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배우려는 서른이라면! 아니 젊지 않아도 챙겨야 할 가족이 없는 미혼이었다면 고민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한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다. 일상생활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연차와 칼퇴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이었다.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원체 걱정과 고민을 사서 하는 스타일이라 "잘할 수 있어!", "아니 못할 거 같아...", "뭐 어때! 사람 다니는 회산데... 할 수 있겠지!!", "아... 야근... 주말근무 부담스러운데..."... 반복적 고민은 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만 높아졌다. 잠도 못 잘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입사 제안을 했던 지인의 한마디로 수많은 걱정과 고민은 사라지고 단박에 입사를 결정했다.


"언제까지 불안정한 소속감으로 일할 거예요? 힘든 건 잠시예요. 나이도 생각해야죠... 경력 쌓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돈 벌면서 경력 쌓는다 생각해요. 이제 가족이 아닌 자신을 위한 삶을 사세요!"


맞다! 계속 신입으로 일할 순 없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가고 나이는 한 살 먹을 것이기에. 고민은 길었지만 선택은 속전속결. 좋은 것만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이직을 결정했다. 분명 후회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난 [불안한 미래]를 채워 줄 좀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하는 게 급선무라 생각했다.


한 달의 준비기간을 거쳐 파견직으로 근무했던 회사와 좋은 이별을 했고, 그해 겨울 나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한번 신입 사원이 되었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보다 한 뼘이라도 더 나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이길 희망하며. 하지만 달콤한 상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출근 보름 만에 모든 걸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경력이고 나발이고 내 정신건강이 더 중요했다. 업종의 특성상 바쁜 야근 시즌과 주말 출근을 뺀다면 어차피 회계(경리)와 인사업무를 해봤기에 세금 신고하는 것만 잘 배운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차올랐을까.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자신감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졌고 출근하는 길은 불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마음대로 흘러간 적이 제대로 있었던가. 아니나 다를까. 내가 회사에 다니며 세무회계 사무소에 업무를 맡겼을 때와 내가 역으로 세무대리인이 되어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세상이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모든 것이 낯선 것처럼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함께 일하는 동료는 회계사님을 제외하고 여자뿐이었고, 기혼자는 오로지 나 혼자였다. 여기에서 오는 괴리감은 일할수록 더욱 깊어졌다. 신입으로 첫 출근 했던 그날을 뒤로하고 하루 이틀 출근이 늘어날수록 마음의 어둠은 짙어졌다.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연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까?'라는.


그렇게 난... 꿈속에서 조차 도망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난 결코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미리 말해두고 싶다. 어딜 가도 참을성, 인내심 하나는 기죽지 않을 만큼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입사 보름 만에 퇴사 고민을 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패자,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신입의 헬게이트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활짝 열려버렸다.




1년의 시간을 돌이켜 보면 매 순간 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버텼음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어느 순간에도 쉽게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포기는 너무 쉽지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순간이 너무 어렵고 막막하다면 너무 먼 미래를 상상하지 말고 바로 오늘! 이 하루를 잘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전하고 싶다. 오늘도 부단히 애썼을 나와 당신이 다가올 내일을 겁내지 않길 바라며 응원하고 싶다. 참 수고했다. 우리!





<상황을 바꾸는 마인드셋>

여기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 - 어디든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 거야!

나는 왜 이럴까...ㅜㅠ - 나만 이러는 건 아니야!

또 신입이네... - 신입이 어때서 이제 경력만 쌓으면 나도 경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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