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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림 Mar 15. 2021

집에 혼자 있기 싫었을 뿐.

자식도 부모를 선택하지 않는다.

마흔이 된 지금 한 아이의 엄마로 10년을 살아내고 있는  가끔 내 아이를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본다. 지금은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 더 나아가 중, 고등학교까지 라이딩하는 부모들이 많아지며 아무렇지 않은 일상들이 나의 어린 시절은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안보이면 불안한 너

내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아이의 등하교 거리는 차로 5분,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그럼에도 나는 워낙 험한 요즘 시대에 불안한 마음이 앞서 매일 함께 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과잉보호가 심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3학년 2학기부터는 아이가 혼자 등하교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하지만 불현듯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버리면 그만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가장 무서웠던 어린 시절 '그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아이를 금방이라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버리게 된다.


내가 5살 즈음이었을까.

자그마한 발가락에 바람이 스며들기라도 하면 마치 따가운 가시가 박힌 느낌까지 드는 추운 겨울이었다.

엄마의 품이 가장 그립고, 엄마의 냄새가 가장 좋을 어린아이. 그때 난 엄마가 일하러 가는 아침이 오지 않길 매일 밤 기도하며 잠에 들었다. 오죽하면 '버스가 없어지게 해 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를 하며 엄마 품에 파고들어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엄마가 나를 두고 일하러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일 따위는 하지 마!'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엄마를 잃어버렸던 그 날이 오기 전 저녁에도 여전히 난 엄마와 헤어지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만의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엄마 몰래 숨어서 따라가는 거야. 그럼 엄마랑 헤어지지 않겠지!'


난 다음 날 아침 생각했던 계획대로 엄마의 출근길, 살금살금 엄마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엄마를 따라가겠다는 급한 마음에 바람이 날 선 아침 잠바도 걸치지 않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의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엄마에게 키면 혼날까 봐 무서웠고, 겨울의 아침 혹시나 엄마를 놓쳐버릴까 두려웠다. 그렇게 한 참을 엄마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어린 내가 어찌 알았을까. 엄마가 그만 버스를 타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저 엄마가 탄 커다란 버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을 뿐이었다. 엄마의 버스가 사라지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엄마만을 보고 집을 나섰기 때문에 도무지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 버스정류장에서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경찰서에 가게 되었고, 집주소도 전화번호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나를 경찰은 버려진 아이라 생각했다. 찾는 부모도 없었기에 가까운 고아원으로 인계되었다. 그저 무서웠더 기억밖에 없었다. 엄마를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울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고아원에서 첫 밤을 맞이한 깊은 밤!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여도 그것은 틀림없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쏜살처럼 튕겨 달려 나가 엄마에게 안겼다. 그리고 엄마와 난 한동안을 그렇게 껴안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다른 날과 똑같이 출근을 했고 그때 당시 핸드폰도 당연히 없었기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 대문은 반 즈음 열려있었고, 나는 집에 없었다고 했다. 딸이 없는 방안을 마주했을 때 그 등골이 오싹해지고 모든 머리카락이 주뼛 서버리는 느낌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친정엄마셨다.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주변 이웃분들과 함께 동네를 몇 바퀴를 돌며 찾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없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고 했다. 결국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고 인상착의를 이야기하니 비슷한 하이를 늦은 오후 고아원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고, 바로 내가 있는 고아원으로 한달음에 달려오셨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때 그 경찰분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부모가 아무도 아이를 찾지 않아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래도 엄마를 찾아 다행이라며 친정엄마를 위로해주셨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추억이 된다지만 난 여전히 그 일을 겪은 후 언제든 엄마를 잃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며 살았다. 지금 내 자식도 언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상 나를 감싼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와 남편의 이름,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노래 부르듯 외우게 했다. 어린이집에서 견학이라도 가면 불안해서 보내지 않았던 날들이 더 많았고, 어딜 가도 내가 함께 이동해야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아이가 10살이 된 지금은 핸드폰도 사주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난 가끔 꿈을 꾼다.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엄마와 헤어지는 꿈을.


어린 난 그저 엄마와 헤어지기 싫었고, 엄마의 품이 그리웠다. 1분 1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엄마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아니 나보다 더 했을 것이다. 어찌 감히 엄마의 모성을 어린 내가 따라갈 수 있었으랴.

어린 딸을 집에 혼자 두고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셔야 했을 그때의 친정 엄마에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셨을지 감히 이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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