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을 경험하다
남도에서 태어나 20년을 살고 서울에서 40년을 살아온 나는 말 그대로 서울여자다. 서울여자의 이미지 중 차도녀에 가까운데 서울 그것도 강남에 잘 적응하고 살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남한테 신세 안지고 상대방의 호의를 받는 것도 이제는 그닥 편해하지 않는다. 오래전 공중목욕탕에서 나이 드신 분에게 등을 밀어 드리겠다 했더니 단박에 거절당한 적이 있다. 아마 모르는 이에게 신세지기 싫어하는 성향으로 사는게 서울사람들의 성향이구나...생각하고 더 이상 그런 호의는 하지 않겟 되었다. 이제 그런 사고가 내 몸에도 새겨져 있다.
지난 주 친구랑 해파랑길 도보여행을 했다. 50코스 중 걷지 않은 10개 코스 중에서 구룡포에서 문무왕릉까지 13, 12, 11코스 중간까지 2박 3일 일정을 소화했다. 첫날 43000보, 둘째날 37000보 기록되었다.
구름이 살짝 낀 날씨도 우리의 피부보호에 한 몫 하고 동해안의 깨끗한 바다는 우리의 감탄사를 유발했다. 해파랑길은 여전히 아름답게 우리의 눈을 푸르게 하고 해송이며 몽돌해변이며 백사장이며 그 한적함에 나는 시간이 날 때면 혼자서 도보여행을 하기도 했다. 혼자서 걸을 때는 누구의 시선도 마다하고 혼자서 묵상하는 마음으로 걷기 때문에 그 지역 분들과는 말을 잘 섞을 기회도 없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친구와 함께 인지라 긴장을 좀 덜 하게 되어 얻게된 경험담이다.
베낭을 짊어지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도보여행을 하는 두 할매를 따스하게 대해준 포항 근처 장기면 주민들에 대한 소박하고 이야기다.
해바랑길 13코스를 남쪽으로 걷다보면 30코스 북쪽보다 쉴 수 있는 카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7시 30분 출발하면 9시쯤 모닝커피를 마시고 싶어지는데 대부분 10시에 문을 여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일찍 문 열러있는 카페를 찾다가 민박을 겸한 소박한 찻집에 들어갔다. 80대 정도의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 물어신다.
"어디서 왔어요?"
" 서울에서 왔는데 구룡포에서 걸어오는 중입니다"
"아니고 멀리서 왔네. 내가 교육받으러 가는 길이 아이모 집에 가서 찰밥을 먹고 가라 할낀데...우리 손자가 이번에 서울대에 입학해 나도 갔다 왔다우"
"아이구 축하드립니다."
맞는다. 이 할머니는 동해안 해녀였다. 해녀들은 가끔씩 교육을 받는다 한다. 일요일인 이날 교육받으러 가는데 버스정류소 앞 이 민박카페에서 인심좋은 여사장님과 차도 얻어마시고 버스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이셨다.
'처음 보는 타지인에게 밥을 먹이고 싶다니...'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친절 아닌가. 그 해녀 할머니의 초대에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버스 타러 가시면서 조심해서 잘 다녀가라는 인사말에 진심이 느껴져 마음이 훈훈하게 데워졌다.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러 해변가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찾기도 힘들어 눈에 띄는 소박한 횟집이라 우리는 물회를 주문한다. 낯선 곳이라 우리는 걸으면서 가끔씩 만나는 현지주민에게 눈인사 또는 안녕하세요 하고 말인사를 했다. 아마 그 식당에서도 우리가 인사를 했나보다. 옆 자리의 손님 또한 우리의 소재를 묻고는 대뜸
" 이 장기에는 꼭 가야하는 명소가 있어요. 장기읍성과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은 지금 축제중인데 내가 태워다 드릴테니 가보고 가셔"
" 아 예.....이 지역은 처음이라...." 친구와 빨리 의논를 한다.
" 이 친구들은 다 내 고향친구고 내가 은퇴한 뒤 고향에 돌아왔는데 살기 좋고 구경할 것도 많아요. 같이 갑시다"
"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읍성은 참 살기도 좋고 풍경도 좋으니 태워주신다니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둘은 그 분의 차를 타고 장기면 행정면사무소 앞에서 마침 포항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해설사와 동행하여 잠시 장기면의 유배문화에 대해 듣다가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것 같아 장기읍성으로 걸어 올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읍성, 높은 곳에 위치해 넓은 농지를 내려다보여 전망이 좋았다. 그 분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있고 지나는 여행객에게도 선선히 마음을 열어주셨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인정이었다.
그리고 읍성에서 내려오면서 지나는 차를 히치하이킹도 한다. 순순히 문을 열어 우리를 장기면사무소 까지 태워 준 주무관은 음료와 떡도 나누어 주었다. 마침 축제기간이라 남은거라면서. 후후후
그 후로도 이유없이 우리를 격려하며 따뜻하게 대해주던 여러분들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차도녀 서울할매는 장기면에서 예기치않은 인정 넘친 분들을 만나 모처럼 훈훈하게 데워진 마음으로 해파랑길을 걷고 문무왕릉까지 내려온 후 경주역에서 서울행 기차로 무사히 귀가했다.
그렇지. 우리가 어릴 때 살던 고향에서는 다들 인정스럽게 살았는데... 시대와 시절은 변하기 마련이다.
아직도 인정이 남아있는 그 곳 포항 장기면 따뜻하고 인정넘치는 분들에게 머리숙여 감사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