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사이에서도
영화와 미니시리즈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널리고 널렸다. 한 5년 사이 갑자기 늘어나 무진장 쏟아지는 볼거리에 이제 노화된 눈의 시력마저 아니 더 중요한 감성마저 너덜너덜해지는 듯하다.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볼거리에 좋은 점이 많다.
<우물 안 개구리> 란 속담이나 90년대 우리나라 주요 정책 어젠다가 <세계화> 였다는 걸 알기나 할까?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세계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관습이 바뀌고 있는지...
그래도 바뀌지 않고 있는 건 있더라.
누군가의 칼럼에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은중과 상연>이란 드라마가 볼 만했다는 걸 읽고 관심이 갔다. 그놈의 AI가 권해주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가끔은 전문가가 권하는 걸 기억했다가 검색해서 본다.
요즘 정말 구독하는 신문의 문화면에서도 이 드라마를 소개하고 있다.
두 여자의 오래된 우정과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등등으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꽤 괜찮은 시리즈였다. 감정선이 너풀너풀거리지 않고 30여 년에 걸친 두 여자의 우정과 갈등이 영화적인 방법으로 소모되지 않고 일상에 있을 법한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어떤 작가가 이렇게 영화 같지 않게 잘 표현했나 궁금증도 생겨 엔딩자막을 유심히 보기도 했다. 공동집필이 아닐까 했는데 단독집필이었다. 참 잘 쓴 극본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영화팬도 아니고 감정선도 세밀한 사람이 아니라 작가에 관심을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은중과 상연역의 두 배우의 연기나 영화적 기술 같은 건 전문가들의 영역이라 나는 언급할 의사가 없다. 다만 나한테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왜 내가 이 장면에서 눈물이 찔끔 날 만큼 감동을 받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의아해 약간의 분석을 해봤다.
촬영감독인 상학과 공동 PD인 은중과 상연. 상학은 상연의 부탁은 거절하고 은중의 부탁은 받아들인다.
'이 남자 의리 있네'
남자들은 그들끼리 아주 중요한 사회적 덕목으로 < 의리 의리 의리 >를 외친다. 남자 대 남자로.
남자 대 여자 남편과 아내 사이엔 의리가 존재할 수 없는가?
<조강지처 불하당 >이란 고사성어가 있듯이 반드시 부부간에도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요즘 회자되는 <트로피 아내>는 시대가 만든(?)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도 있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관이 바뀐다.
"사랑이 어떻게 바뀌니?"라고 외치던 영화 <봄날은 간다>는 25년 전의 영화다.
그 시대엔 저 문장이 갈아타기 하는 연인들에게 면책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헤어진 남녀관계에서도 최소한의 의리를 보여준 상학인지라.
10년 전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를 지킨 상학인지라.
가끔씩 현실에서도 의리를 보여주는 상학 같은 남자를 볼 수 있으면 한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늘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즉 몸속 세포가 저절로 기억해 내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을 장착하는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늘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
테토남이 대세인 요즘인데 내가 시대를 잘못 읽어내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여자들은 의리가 있나? 왜 남자들에게만 의리를 따지나? 하고 묻는다면
사실 이 문제에 대한 분석은 해보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가 나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