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건 없니 날 웃게 했던/ 예전 그 말투도 여전히 그대로니/ 변한 건 없니 내가 그토록/ 사랑한 미소도 여전히 아름답니/ 그는 어떠니 우리 함께한 날들/ 잊을 만큼 너에게 잘해주니/행복해야 돼 나의 모자람/ 채워줄 좋은 사람 만났으니까.(김연우, ‘여전히 아름다운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내가 사랑한 미소’를 떠올리다 ‘여전히 아름다운지’ 생각에 잠긴다. 생각을 따라 생각이 흐른다. 미소 자체가 아름다운지, 내가 사랑해서 아름다운지, 내가 사랑한 미소만 아름다운지, ‘아름다움’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아름다움’美은 선함善이나 옳음眞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 선하면 아름다워 보이고 옳으면 아름다워 보인다. 그것은 선함이나 악함, 옮음이나 그름에 대한 ‘의식’에 따른 것이다. 그 ‘의식’에 따라 선악이나 진위는 달라진다. 어떤 의식에게는 선함이 악함이고 옳음이 그름이기도 하다. 그 반대이기도 하다. 선함과 악함, 옳음과 그름, 둘은 한 몸이다.
악함일지도 모르는 그름일지도 모르는 선함과 옳음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을 긍정해 주고 살려주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생명을 긍정해 주고 살려주는 선함은, 옳음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아름다움이 본디 그런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의식’하는 아름다움은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나의 아름다움美에 대한 의식, ‘미의식’美意識이다.
위험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가 ‘미담’美談인 것도, 거짓으로부터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려는 ‘저항’이 아름다운 것도 생명을 살려주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나의 ‘선함’이나 ‘저항’에 대한 ‘의식’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 주름진 얼굴을 가진 노인의 미소, 나와 생김새나 피부색이나 입장이나 처지는 다르지만 그들의 미소는 그 자체로 쾌감을 준다. 그런데 쾌감을 넘어 미소가 ‘아름답다’고 ‘의식’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事緣이 있다고 여긴다.
사연은 보거나 듣거나 경험하거나 상상하거나 한 것들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 구성한 주관적인 이야기이다. 그들 주관적인 사연에 따라 아름답다고 의식하는 미의식도 주관적이다. 아름다움은 미의식은 제각각인 것이다. 제각각이지만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아름다움도 미의식도 있을 것이다.
그들 사연에 따라 생명을 긍정해 주고 살려주는 것들이 아름답다는 미의식에 나는 공감하고 동의한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내가 사랑한 그 미소, 그 선함, 그 옳음, 그 저항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여기며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보며 웃으며 걸어간다.
2021.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