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버먼은 그렇게 죽었지만 비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히
위대하고 행복한 마침표도 아니다.
이것이 오 헨리의 작품의 매력이다.
슬픈데 따뜻하고, 찡한데 안식이 있다.
희망과 절망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애상(哀傷)이나 애잔함은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있다.[정희진처럼 읽기, 290]
298
격심한 빈부 격차 시대에 장인(匠人) 지망생의
조건은 어떤 이들에게는 도전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불평등하다. 그렇지만 개별적인 몸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은 공평한 부분이 있다.
어쨌거나 몸은 본인이기 때문이다.
운동은 립싱크나 대필이 불가능하니 윤리의
마지막 영역일지도 모른다.[정희진처럼 읽기, 291]
299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상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정희진처럼 읽기, 292]
300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한 이들이 독자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연습은 끝이 없는 개념이다.
외롭고 지루한 연습이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진실을 아는
자의 만족스런 불평이다. 김승옥도 알고 있다.
“천 번만 먹을 갈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結晶)되어 남을까?”
[정희진처럼 읽기, 293]
301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노동하고 존재하고
일상을 사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쓰더라도 자기 이야기를 그 반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서술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는 것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정희진처럼 읽기, 298]
2025.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