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사랑에 대해, 사람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에게서 ‘무슨 말을 듣든 다 괜찮다고 또다시’
말할 거라면, 다시 시작하지 말라고.
괜찮을 땐 괜찮다는 말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는 말을, 여하튼 언제나 당신의 진심을
말하라고.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좋은 관계’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314
나는 수연과 상혁의 그 뒷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그날 뒤돌아서지 않았다. 함께할 방을
얻을 뻔했으나 얻지 않았다. 헤어질 뻔했으나
헤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그들은 서로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 평범하고 특별한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물론 중간 결말이다.
삶에, 완벽한 결말 같은 것은 있을리 없으므로.
완벽하지 않은, 사소한 중간 결말과 결말 들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315
차마 소설이 내 모든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이 무섭지만, 그래도 소설을 쓴다.
안 될 것 같은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조금씩 조금씩 ‘안 되지 않는’ 찰나들이 모여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된다.
이것이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시는 못 쓸 것 같은 시간이
있었고, 간신히 지나갔고, 또다시 찾아오리라는
것만은 안다.[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316
나는 한동안 그 옅음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관계도 진하거나 짙거나 너무 가까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하고 옅고 조금은 먼 관계,
그러다 언젠가는 다시 진해지거나 짙어지거나
가까워질 수도 있는, 부모와 자식도 결국 그렇게
하나의 열린 관계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선을 밟고 서 있든, 멀찍이 떨어져 서 있든,
인간에게는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317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게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여기 작게 기록해 둔다.
[정이현, 우리가 녹는 온도]
2025.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