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답’은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다.
의미는 기존에 주어진 가치에 의한(by) 것이
아니다. 찾아야 할 대상이다. 그것도 중단 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 리는 없다.”
([좌파로 살다],에른스트 블로흐)
[정희진처럼 읽기, 251]
319
술, 담배, 도박, 초콜릿, 관계, 섹스, 쇼핑,
미디어(스마트폰), 게임……. 사람들은 다양한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되지 않은 몸은 드물다.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긍정적 중독(일, 운동, 공부…)인
경우 문제가 덜 될 뿐이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 (“……없이는 못 살아.”)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정희진처럼 읽기, 255]
320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정희진처럼 읽기, 256]
321
인생이 강물이 아니라 사막을 혼자 걷는
일이라면 애초에 물에 빠지는 사람도 없다.
우리가 선택한, 그립지만 괴로운 대상들은
사막을 지나가다 잠시 스친 풍경들이다.
조우했을 뿐 오아시스에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인생에 오아시스가 없다고 생각하면
익숙한 것들의 막강한 존재감이 다소 상대화된다.
중독보다는 생존의 힘이 세다고 믿는다.
천천히 조금씩 이별할 수 있다.
[정희진처럼 읽기, 257]
322
생로병사가 사실이고 무병장수는 희망,
아니 탐욕이다. 꿰맨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정희진처럼 읽기, 260]
2025.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