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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Jul 22. 2023

그들이 가장 빛났던 순간

소설 [태백산맥]의 ‘심재모, 염상구, 정하섭’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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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묘미는 여럿 있지만 나에게는 단연 등장인물이다. 주연과 조연이 나뉘어 있지만 어느 하나가 없으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주연보다 더 돋보이는 조연도 있다. 주연과 조연을 떠나 나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어서 공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연을 꼽자면 염상진이나 김범우, 하대치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태백산맥’을 만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에 남아 문득문득 나타나는 인물은 그들이 아니다. 심재모, 염상구, 정하섭과 소화는 소설에서 조연이지만 내 머리가 기억하는 주연이다.



2


한국군 장교 심재모는 벌교의 계엄군 사령관이다. 인간을 ‘좌左’와 ‘우右’로 나누어야 한다면 그는 ‘우’다. 하지만, 그는 ‘우’에 고정된 인물이 아니라 좌와 우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무의식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우’였다가 ‘좌’와 ‘우’가 나뉘게 된 ‘현실’을 ‘인식’하면서 고뇌한다. 심재모가 문득문득 내 머릿속에 나타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인식의 변화’를 겪으며 괴로워하고 고뇌한다. 변화의 순간.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고통을 통한 변화의 시작은 ‘현실 인식’이다. 물론, 인식 이전에 충격적인 사건이나 새로운 환경에 따른 경험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모든 인식이 그렇듯 그의 ‘현실 인식’ 역시 자생적이지 않다. 그의 잔잔한 의식에 야학을 하던 서민영 선생이 돌을 던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들을 희생시켜서 생존하는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그가 ‘좌’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인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3


‘완장’으로 기억되는 염상구. 형인 염상진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로 그는 삐뚤어졌다.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야 한다면 그는 ‘악’이다. 태초에 악이었는지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의 관심은 그의 삐뚤어짐이다. 그의 삐뚤어진 모습은 아니더라도 형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라는 그가 삐뚤어진 이유는 친숙하다.


그가 완장을 차고 극우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행들은 빼고. 장남에 대한 편애로 차남들이 인정투쟁을 벌이는 차남들의 가족사. 장남은 장남이라서 차남은 차남이라서 아버지는 아버지라서 어머니는 어머니라서 힘든 가족구조가 야기한 사회사. 장-차남이 흔치 않은 오늘날의 저출생 시대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가족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든 가족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 현실이다.


편애로 삐뚤어진 염상구들의 사회사는 ‘태백산맥’을 넘어 세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그런 삐뚤어짐을 세계사의 야만, 파시즘의 작동기제로 설명한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평범한 인간의 성격구조가 조직화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설명한다. 라이히는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 ‘성격무장’을 통해 ‘자유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권위에 기댐으로써 파시즘과 같은 독재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그들 말하지 못해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분별 있게 표출되었다면 좋았으련만 인정받기 위한 그들의 행위가 타자에 대한 몰인정이라는 폭력을 야기함으로써 모두의 불행을 초래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어떤’ 권위에 기댈 것인지 분별하지 못해 일어난 무분별한 행동은 그들의 잘못이지만 형식적이고 배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애초에 그들이 온전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마련해 주는 것은 ‘건강한 권위들’의 몫이리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접하게 되는 전 세계 극우파시스트들의 소식은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완장’을 떠올리게 하는 ‘태극기 부대’,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다른 사람의 좋은 에너지를 빼앗는 ‘뱀파이어’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악행’이 사회구조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인식의 변화를 겪어 그들의 ‘악’이 아니라 ‘평범함’이 빛나는 순간을 만나기를 바라본다.



4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자가 된 정하섭은 [태백산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나에게 기록해 주었다. 심재모가 인식의 변화를 겪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빛났다면, 염상구가 평범함에서 악함이 되는 과정을 통해 빛났다면, 정하섭은 공산주의자로서의 삶과 소화와의 사랑, 그로 인해 소화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빛났다.


물질적 부를 쌓기 위해 어떤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대립을 넘어 공산주의자라는 삶을 사는 정하섭의 모습은 안타깝게 빛났다. 아버지와 대립하게 된 것은 안타까웠지만 공산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은 빛났다. 그리고 무당의 딸 소화와의 ‘사랑’이 소화를 변화시켰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그의 삶과 사랑이 소화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언젠가 염상구가 극우가 된 것이, 정하섭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라는, 그들의 삶을 결정지은 중대한 뿌리는 아버지였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그 의문은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것은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낳았다. 사람에 대한 ‘반감’은 그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하고, 사람에 대한 ‘호감’은 그를 닮고 싶게 한다. 그 ‘반감’과 ‘호감’을 결정짓는 것은 염상구의 경우처럼 인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정하섭의 경우처럼 가치관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아버지라면 영향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 중심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중심 사회라면 어머니의 영향이 클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인식이 형성되더라도 심재모와 같이 서민영이라는 ‘사람’에 의해 인식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식의 형성과 변화는 ‘사람이라는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이었다.


언젠가는 정하섭이 사랑한 것이 공산주의였는지 소화였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정하섭이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이전에 알고 있던 소화에게 다가간 것이어서 품었던 의문일 것이다. 그 의문은 ‘이념이 우선인가, 사람이 우선인가’라는 의문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어릴 적부터 정하섭을 흠모하던 소화가 공산주의자가 된 정하섭과 사랑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정하섭을 위해 헌신하며 지주를 위한 무당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으려는 소화의 모습에서 값진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하섭과 소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이타적이다.(리처드 도킨슨, ‘이기적 유전자’ 참고)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변한다. 동의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들의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인간도 이타적일 수 있다는 사실, 쉽게 변하진 않지만 사람도 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얼마든지 더 이기적인 방향으로도 더 이타적인 방향으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현실 인식’을 통해 작지만 큰 변화를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 세상 모두가 외면하더라도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게 빛난다. 그렇다고 보는 것이 나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감성과 관점이다. 이기적인 과학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인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만물은 변하기 때문일 것이며, 이기적인 과학의 도움으로 인간은 이타적인 방향으로 인류를 확장해 갈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동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적 이타주의자’, ‘이타적이기 위해 이기적인 인간’. 언제부터인가 나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되려 한다. 모순적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지금, 여기’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나의 운명전략이다. 외로울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자유롭다. 그럼에도 세상 모두와 함께하고 싶은 것 또한 나의 이기적인 본성의 발로이리라.


2021.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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