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읽기
소설『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분단된 한국 사회의 비극적 어제와 오늘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어제의 비극이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국의 희극적 내일을 위해 계속 쓰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아버지가 바랐던 ‘해방’은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으로 보인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아버지가 ‘해방주체’로서 살았고 살려했던 ‘해방세상’을 통해 우리의 해방주체, 우리의 해방세상을 일으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는 아버지의 딸 아리가 ‘사람이 오죽하먼 글것냐’를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를 받아치며 ‘오죽하먼은 개뿔’이라며 냉소하듯이, “분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는데, 젊은 세대가 민족의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분개”4) 하는 아버지에게 유물론자로서 현실을 직시하라며 냉소하듯이, 학교를 때려치운 베트남 아이와 담배를 피우며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베트남 운운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냉소하듯이, 아리는 냉소하고 또 냉소한다.
그런데, 아리가 냉소하는 대상은 “나에게 나와 같은 존재였”던, “일심동체”였던, “나의 우주”(아버지200)였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빼앗아간 “국가”, “자본주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자본국가권력 및 남북분단 체제 유지와 노동탄압을 위한 이데올로기는 ‘친북좌익빨갱이라는 공안몰이’로, ‘국가보안법’이라는 노동자민중을 탄압하는 정치적 장치로, ‘한·미·일 자본국가권력 동맹’이 야기하는 전쟁위협’으로 오늘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우리의 삶을 빼앗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면서 아리는 아버지를 빼앗아간 세상과는 다른 세상, 아버지가 살려했던 삶 그 자체였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함께 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살았고 살려했던 ‘해방주체’로서의 삶이 곧 아리의 삶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해 보이는 것은 아리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리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씀으로써, 또한 모든 아버지의, 모든 사람들의 해방일지를 씀으로써, 자기 방식의 ‘해방주체’로서 자신이 살려는 세상을 살며 만들어가고 있기도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살려했던 ‘해방주체’로서 아버지의 삶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아버지가 “촘촘한 그물망”과 같은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나 좁고, 돌고 돌아 만난다. 학수는 아이 얼굴을 보고서도 자기가 도움을 준 할머니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이 실재하는 양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났다.”(아버지239) 그것은 ‘자신부터 스스로 평등한 사람이 되는’, ‘평등한 관계를 살아가는’, 그러한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탓하기보다 자본주의를 알아가며 자본주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몸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해방주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해방주체’ 그 자체가 되는 것이기도 할 테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몸소 평등한 삶을 실천한 ‘평등한 생활의 삶’ 그 자체였던 아버지였기에,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아버지245)였기에, 그런 아버지를 따라 ‘해방주체’가 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 보이지만, 그런 아버지가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던,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아버지249)던,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아버지265)였다는, 즉, 아버지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위한 ‘해방주체’가 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평등한 세상’은 그런 세상을 살아가려는 우리 모두가 각자 만들어 온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 모두에게는 인류사적 ‘해방주체’로서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불현듯 만나기도 한다. 한 사람을 통해서, 한 사건을 통해서, 한 사랑을 통해서, 한 투쟁을 통해서, 발견하고 발견됨으로써, 씨 뿌리고 꽃 피움으로써 삶과 세상 곳곳에서 만나기도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배경을 이루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의 풍경이 ‘묘하게 평화로운’것이었다는 대목은 삶은 영원하지도, 인간은 완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묘하게라도 평화로운 것이 전쟁을 겪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아 작은 위안을 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지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성토하는 대신 서로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중이었다. 묘하게 평화로웠다.”(아버지212) 아리의 말처럼 “적당히 분주하고 평화로웠”(아버지212)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어쩌면 죽음으로써야 비로소 가능한 평화일지도 몰랐다.”(아버지212) 인류의 존망이라는 처절한 전쟁터에 내 던져진 것만 같은 오늘의 ‘해방주체’들이지만 ‘해방주체’들이 서로에게 ‘자신들 방식대로’ ‘적당히 분주한’ 삶의 태도를 존중해 주는 것은 ‘해방주체’들이 ‘평등하게’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자 ‘여유’로 보인다.
2023. 6.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