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피에르 클라스트르)와 ‘국가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스미다 소이치로)의 저자들에게 문제는 ‘국가’일 것이다. 그러니, 국가에 ‘대항해야’ 한다고 쓰고 있는 것일 테다. 다른 무엇보다, 맑스가 말하는 “국가권력이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라는 의미에서 그럴 것이다.
그러한 ‘국가’가 문제라는 점에서 그들 저자들이 ‘대항’을 말하는 것일 테다. ‘대항’ 없이 그런 국가와 ’다른‘ ‘사회'나 '코뮌’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대항’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해서, ‘대항’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국가와 ‘다른’ ‘사회'나 '코뮌’이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가능한지보다 국가에 ‘대항’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국가에 ‘대항’하며 사는 것이, ‘국가’와 다른 ‘사회'나 '코뮌’을 사는 것인 양 국가 ‘내에서’ 국가에 ‘대항’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치 권력을 전취할 의무’가 있다고 쓰고 있다.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국가를 위한 '의무'일 것이다.
그러니까, 맑스는 국가 ‘내에’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나 '코뮌’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전취한 국가를 통해 자본주의 국가를 넘어선 ‘사회'나 '코뮌’을 만들어 가려 했던 것일 테다. 맑스가 국가에 ‘대항’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들 저자들이 주장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나 '코뮌’이 지구 곳곳에 존재하기도 한다. 한데,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30여 년간 국가에 ‘대항하며’ 생겨난 시민사회나 소규모 공동체들이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흡수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낸시 프레이저의 말이 의미 있게 들린다. “확실한 헤게모니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불안정한 공백 상태와 정치적 위기의 지속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그람시의 말은 진실로 들린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낸시 프레이저, 39)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확실한 헤게모니의 부재’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나 '코뮌’의 부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연대’의 부재로 보이지도 않는다.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국가의 부재,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의 부재로 보인다.
‘새것’은 어떻게 올 것인가 묻는다면, 국가에 ‘대항’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사회'나 '코뮌’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으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오지 않을까. 그것이 오래전부터 만들어 온 ‘새것’이 아닌가 답하게 된다.
2024. 7. 31.
[인용 출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이학사 2005. 원제 : La Socie'te' Contre l'Etat de Pierre Clastres(1974)
-국가에 대항하는 마르크스 / 스미다 소이치로 지음, 정성진·서성광 옮김, 산지니 2024.
-K. 맑스/ F. 엥겔스: 「공산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최인호 역, 박종철출판사 1994.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책세상 2021. 원제 :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