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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Dec 04. 2024

서른 즈음에

음악도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은 음악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을 듣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창작의 결과인 그 사람의 음악에는 그 사람의 노동과 정신, 그 사람의 삶이 녹아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음악이, 예술이, 삶의 드러남이라는 사실에서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겠다. 어떤 사람이기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았기에 그와 같은 창작이 가능했을까. 삶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예술은 삶의 결과이기도 하고 삶이 예술이기도 한 것이겠다. 어떤 예술이든, 어떤 삶이든 그럴 것이다.      




김광석의 예술적인 삶을 ‘소극장 1,000회 공연’과 ‘할리데이비슨 타고 세계일주’에서 읽는다. 그의 삶을 ‘자유로움’에 대한 ‘살아 있음’에 대한 갈망으로 읽는다. 그런 사실에서 모든 사람은 예술적인 삶을 갈망한다고 여긴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살고 있다는 것은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드러남이 어떤 예술, 어떤 삶이 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다.      


단 한 사람의 관객만 있어도 그가 할 수 있는 한 공연을 하겠다던 그에게 천 번의 소극장 공연은, 그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살아있음이,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것이었겠다.      


‘나의 노래’의 노랫말처럼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인 것이었겠다. 해서,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마시고 노래 하겠다’는 것이었을 게다. 그의 노래에 모두 귀 기울여 그의 노래가 멀리멀리 날아가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고 노래하며 소극장에서 쉼 없이 노래하며 자유롭게 살아있는 듯 보였던 그도 자신의 노래, 자신의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 즈음에 그는 그의 예술을, 삶을 다한 것일까. ‘서른 즈음에’ 그는 떠났다.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그렇게 그와 이별했다.     




지금 그는 할리데이비슨에 기타를 싣고 세계 일주를 하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도 어디선가 노래하고 있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 ‘서른 즈음에’) 



2024. 12. 4.



서른 즈음에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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