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협력, 상생.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이고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사회에서든 누구나 늘 바랐고 바라는 것 같지만 인류사에서 실재가 되었던 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 끊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 싸움, 전쟁까지.
누구나 바라지만 쉽지 않은 건 왜일까? 누구나 바라는 것 처럼 보이지만 진심은 아니라서? 아니면 내가 먼저가 아니라 네가 먼저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에? 결국 화해, 협력, 상생은 '누가 먼저'의 문제일까?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불필요한 일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 아니,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Gran Torino, 2008)'는 '누가 먼저'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노인 월트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라고 해야겠다. 노감독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을 따라 깊은 생각에 빠졌다고 해야겠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살아남은 대가로 훈장을 타기도 한 월트. 전쟁 참전도, 살인도 본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듯. 그로 인해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어 보이는 노인. 삶에 대한 분명한 소신과 원칙이라는 고집이 있어 보이는 노인.
비록 차고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매끈하게 잘 유지된 그랜 토리노 자동차를 떠올리게 하는 노인, 그 자동차를 탐냈던 많은 이들, 아들마저도 제쳐두고 이웃인 테오에게 물려주는 모습까지. 그는 참 건실해 보이는 노인이다.
그런 그가 베트남계 흐몽족의 갈등에 개입하게 된다. 옆집에 사는 성실하고 똑똑해 보이는 슈와 테오 남매가 (그의 표현대로라면) 동네 양아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자신이 젊은 시절 참여했던 한국전쟁과 같이 타의에 의한 싸움 개입이 아니라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을 이웃으로서 혹은 동네 어른으로서 자의로 방어에 나서게 된 것이다.
화해, 협력, 상생의 문제가 '누가 먼저' 포기하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미 득을 점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이 먼저 자신의 득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화해, 협력, 상생을 말하는 기득권자들에게서 자신을 먼저 포기하는 모습보다 화해는 제스처에 불과하고 뒤로 자기 것 챙기기 바쁜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이어질지 모르는, 모두가 희생될 수도 있는 싸움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모두를 살리는 월트의 모습을 보면서 참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상대적으로 득을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진정으로 화해, 협력, 상생을 바란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먼저 당신을 포기할 수 있는가?
2009.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