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들은 재판에서 “넉넉히 인정된다”는 말을 즐겨 쓴다. 과거 탄핵심판 사례를 보면, 헌재는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헌법·법률 위반 여부, 그 위반의 중대성, 헌법수호 의지 등을 따졌다.
이번에 헌재가 정리한 핵심 쟁점은 비상계엄 선포 과정, 포고령 1호 공포, 군경 동원 국회 봉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압수수색, 정치인 등 체포조 운용 지시이다. 피청구인 윤석열이 5대 쟁점에서 헌법·법률 위반을 저질렀음은 변론 과정에서 “넉넉히 인정”됐다.
헌법·법률 위반의 중대성은 온 나라와 전 세계를 경악케 한 ‘군인의 국회 난입’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인정”된다. 또한 윤석열은 탄핵소추 이후에도 반성은커녕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라는 식으로 시민을 기만하고, 거짓 주장으로 지지층을 선동해 헌정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헌법수호 의지가 없음도 “넉넉히 인정”할 만하다.
-경향신문, 2025. 3. 29. 기사 <헌재 “피청구인 윤석열 파면” 선언할 때다> 중에서*
늦어진다고 해서 ‘넉넉히 인정’되는, 이미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한 사실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한데, '늦어질수록' 헌법재판소의 권위와 ‘신뢰’는 점점 더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늦어지는 이유가 선고에 따른 재판관 개인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 때문이라면 선고의 형식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재판관 개인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미 국민들이 경험하고 있는 심리적 무정부상태가 실질적으로도 무정부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국가’ 기구의 기능에 대해서 국가적인 차원의 재고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은 정부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 부정이 지금 여기의 국가를 그대로 둔 채 다른 곳에 공동체를 만들거나, 부정만 할 뿐 지금 여기의 국가의 성격, 정부의 성격을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바꾸어 내지 못한다면, 그들이 바라는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로서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를, 정부를 부정하겠다면 더더욱 지금 여기의 국가를 지양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회가 국회의원들의 사유화가, 청와대가 대통령 가족의 사유화가, 법원이나 헌재가 재판관들의 사유화가, 결국, 국가 권력이 그들 위정자들의 사유화가 되지 않도록, 더 나아가 사회의 생산수단이 자본 권력의 사유화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 계속 되어야 하지 않은가 싶다.
그리하여, 칼 맑스를 비롯하여 최근의 사이토 고헤이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지속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이후로의 전환을 위해 속도를 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와 같은 전환이, 전환의 노력이 '늦어질수록' 국가와 국민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이익'이 될 것은 없어 보인다.
2025. 3. 29.
*헌재 “피청구인 윤석열 파면” 선언할 때다 [김민아의 훅hook]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