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세 가지는 꼭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스페인어, 카메라(사진술), 춤(라틴댄스). 현지 언어를 준비하는 건 기본이겠고 카메라와 춤은 여행에 기쁨과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진과 댄스는 준비하지 못했다. 썩 내키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출국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던 이유가 컸을 것이다.
카메라는 DSLR 대신 반자동의 미라레스로, 춤은 현지에 가서 배우겠다고 절충했다. 대신 한 달간 스페인어에 집중했다. 그리고 남미의 첫 도시인 보고타에서 3주간 스페인어를 배우고 여행을 시작하기로 계획했다.
한국어, 영어(중학교), 일본어(고등학교), 독일어(대학교)에 이은 나의 다섯 번째 언어였던 스페인어. 영어와 독일어라는 선행학습 덕분에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 여행에 대한 설렘이 학습에 더 열중하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영어나 독일어보다 스페인어가 좋았다.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 역시 여행을 위한 배움이어서 그랬을 수 있다. 좋았던 이유를 몇 가지만 말하자면, 우선, 발음이 정직하다. 독일어보다 더 정직하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되는 정직한 발음이 좋았다. 좋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c, k, p, t가 된소리 끄, 뜨, 까, 따로 발음 나는 것이 좋았다, Casa까사, Cusco꾸스꼬, Taco따꼬, Copacabana꼬빠까바나.. 등등. 그리고 예를 들긴 쉽지 않지만 축약형의 단어들이 좋았다. 주어를 생략하고 동사만 써도 뜻이 통한다거나 등등.
보고타에서 어학원을 다닐 예정이었는데, 애초에 개인 교습 생각은 없었는데, 비용이나 시간 등의 가성비를 따져볼 때 어학원보다 개인 교습이 낫다는 한 유학생의 조언도 있었지만, 그 때문은 아니고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던 앙헬라 선생님 때문이었다. 궁금해서 소개를 받았고 매일 2시간씩 3주간 수업을 했다.
숙제
좋아! 아주 좋아! 완벽해! 괜찮아, 할 수 있어, 해보는 거야. 그 특유의 과한 목소리와 표정과 몸짓으로 칭찬과 격려를 해대신다. 그 통에 못 해도 잘한 것 같고 못 해도 괜찮을 것만 같고
아니, 절대 못할 일은 없을 것만 같은 자신감을 갖게 만드신다.
하하.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는 그 칭찬. 이렇게 어릴 적부터 칭찬을 받아서 이곳 사람들이 자신감에 넘치나 싶기도 하다. 자신감이 좀 과한 것 같기도 하다.
암튼!! 그 자신감에 올리는 건 아니고 부끄럽지만!! 스페인어로 쓰는 첫 번째 글이라 올려둔다. 근데 주제가 자그마치 "문학에 대하여" 캬하하. 부담 이백배!!
몇 시간 만에 쓴 글이라 부끄러웠는데 꼼꼼히 문장 고쳐주시고 문장이 괜찮다. 내용이 마음에 든다. 또 칭찬 퍼레이드를 펼치시는 선생님. 충분히 표현되지 못해, 서로에게 전달되지 못해
아쉬웠던 부분들도 있었지만 나중을 기약하며 일단 패스하기로 했다는.
2012. 12. 4. 보고타
앙헬라 선생님이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었다. 앙헬라 선생님의 작문 숙제 중심의 수업방식은 인정할 수 있는 효과적인 것이었다. 작문을 하려면 단어를 찾아야 하고 문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제 학습자가 숙제를 얼마나 성실히 하느냐에 학업 효과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앙헬라 선생님의 인기 이유는 ‘피드백’이었다. 앙헬라의 수업방식은 새로울 것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피드백’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수업에서 피드백은 매우 중요하다. 학생들의 학업 수준만 아니라 개인 특성을 파악하여 그에 맞는 피드백을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 피드백에 앙헬라 선생님은 탁월하다고 느꼈다. 앙헬라 선생님의 학습자에 대한 칭찬은 선생님에 대한 믿음을 준다고 여긴다. 학습자가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어린 학습자들에게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칭찬도 학습자에 대한 분석과 교감을 통해 적절히 이루어져야 할 피드백의 일종이다. 무턱대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 주면서도 무엇이라도 학습자가 잘한 것에 대해서 칭찬을 해줌으로써 학습자의 보완점을 알려주면서 자신감을 주고, 더 잘하고 싶은 동기 부여를 함으로써 실제로 더 잘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작문 숙제와 관련한 주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신의 분명한 관점들도 믿음을 갖게 하는 데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앙헬라 선생님에게서 살사 댄스를 배우기도 했다.
앙헬라 선생님 말고도 한 달간 묵었던 집(사이타 Sayta 호스텔의 주인장인 존의 집에 빈 방이 있다고 해서 묵게 되었다)의 달리아 이모님이 스페인어 선생님을 자처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마주치기만 하면 아블라 hablar 아블라, 말해, 말해, 하셔가지고 스트레스를 호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달리아 이모님은 단호했다. 언어는 큰소리로 계속 말해야 는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씀이긴 한데--;; 유치원 교사를 하시다 은퇴하신 직업정신이 발동하신 탓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한 달, 달리아 이모님과 앙헬라 선생님으로부터 3주간의 트레이닝을 받고 보고타를 출발한 나의 스페인어는 잘 못해도 알아 들어주는, 알아서 이해해 주던 순박한 사람들 덕분에 불편함 없이 순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페루에서 볼리비아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80세라던 스웨덴 여행자를 만나 잠시 멈칫하기도 했다.
버스 직원과 대화하던 나의 스페인어를 듣고는 그가 했던 말이 ‘You’re a brave man’이었다. 그런 스페인어 실력으로 어떻게 남미 여행을 할 생각을 했냐는 것이었다. 그 말씀은 서툰 언어로 인해 불이익이나 험한 일을 겪을 수 있다는 염려였다. 앙헬라 선생님이 심어준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나의 스페인어 실력을 잠시 돌아보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볼리비아에서 스페인어를 좀 더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 이후로도 몇 달을 용감하게 스페인어를 하면서 중남미를 여행하고 다녔다.
언어와 관련한 진리 중 하나는 언어는 안 쓰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리라. 무엇인들 그렇지 않겠나 만. 한국어도, 영어도, 일본어도, 독일어도, 스페인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면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다면 언어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2023.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