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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안 Oct 25. 2022

무無의 사랑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사랑의 기준에 대해 묻는 이가 있었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는데, 작가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사랑은 정말 운명처럼 오나요. 그 오는 운명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랑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항상 달라지고 애매모호한 ‘나의 사랑’ 정도는 말해줄 수 있다고 답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사랑’이니, 적어도 틀리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는, 사랑이 무無의 상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믿는다. 최소한 사랑을 알아채는 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온다고.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느 순간을 당신이 기억함을 알았을 때, 당신의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문득 내가 선연히 기억하고 있을 때 사랑은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무無가 내 마음 속에서 유有가 되었을 때, 나의 ‘별 것 아닌 순간’이 누군가의 ‘별 것’이 되었을 때.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어느 여름성경학교의 아침에, 눈을 반쯤 감고 앉아있던 어느 당신의 부스스한 머리를 아직 기억한다. 그 사소함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별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수 년 전 누군가의 고백을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어떤 의미로 기억했던 어느 순간을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였다. 그날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소리내었던 것은, 그녀와 나의 다른 의미들이 얼마나 아픈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기억의 차이들 속에서 나와 당신이 가진 유有의 순간이 일치할 때, 나는 그것이 운명이겠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정말 운명처럼 오느냐”는 질문과 “오는 운명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두 질문의 답이 되었을까.     


 내가 기억하는, 종종 생각하며 실없이 웃어도 보았던 그 순간이 당신에게도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혹은 당신이 기억하느냐고 묻는 어느 순간이 나에게도 몰래 소중한 기억이었을 때. 그 순간에 숨길 수도 없이 빨개지던 귓등과 쿵쿵거리는 명치께의 박동들은 여전히 운명이었다고 기억한다. 그토록 강렬한 감정이라면 운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이보다 더해야 운명이라면 나는 그 떨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에 있어 ‘운명’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내게 그렇다. 세상만큼 커다랗고 벅찬 동시에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 무無라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어느새 유有가 되고, 그렇게 맞닿은 기억들을 운명처럼 함께 걸어가다가, 가끔씩은 하나 혹은 둘의 마음 속 유有가 다시 무無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 그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것.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으로 변하는 것. 그러다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는 그럴 운명이었어’ 하는, 말장난 같은 상황들도 종종 튀어나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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