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하더라도, 조금 쑥스럽더라도.
이메일, 메신저 어플이 성행하는 요즘 세상에서 편지를 사랑한다. 글씨도 잘 못 적으면서, 그마저도 자주 틀려 새 종이를 여러 번 꺼내거나 수정테이프로 범벅을 해야 하면서도 그렇다.
어젯밤에는 편지를 적다가 ‘왜 편지를 좋아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게으름으로 똘똘 뭉친 나와 손으로 적는 편지의 관계는 완벽한 모순이다. 그야말로 상극, 정반대의 MBTI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귀찮은 게 싫어 끼니도 종종 거르는 사람이, 문방구에서 고심 끝에 편지지 두어 장을 고르고, 책상에 곱게 펴 내용을 고민하고, 옆의 메모장에 글씨를 여럿 적어보다 좋은 내용을 골라 편지지에 옮기는 일을 하다니. 그뿐인가, 잘못 적으면 다시 적고, 두어 번을 더 틀리면 아예 새 종이를 꺼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잘 쓰고 싶은 마음과 잘 쓰지 못하는 손이 만나면 편지 한 장을 적는 데에는 적어도 30분, 길면 두어 시간이 걸린다. 어쩌다 보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이 들어 새벽에 잠을 청한 일도 여럿 있지만, 생각해보면 한 번도 중간에 그만둔 적은 없는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내가 편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이 모든 귀찮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귀찮음과 비효율, 서너 번의 실수를 하면 모두 뒤집어 엎어야 하는 위험. 이것은 다시 말하면 아끼는 사람을 위해 이 모든 수고와 귀찮음을 이겨내는, 하나의 온전한 마음을 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쓰는 글자마다 당신을 생각하고, 편지지를 넘기며 지을 당신의 웃음을 생각한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 모든 일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편지를 적다 문득 생각한다. 분노로 가득한 편지는 없을 거라고.
이것은 편지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데, 누구라도 편지에 쉽게 욕이나 비난의 글을 적어내긴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편지를 쓰다 보면, 분노나 원망의 감정이 있더라도 차분히 그 결이 잡히곤 한다.
꽤나 오래 전, 그러니까 “생일에는 선물 대신 편지를 받겠어요” 하고 당찬 선언을 했을 즈음에 받은 편지 한 장이 있다. 사이가 조금씩 소원해지던, 성정이 급하고 화가 많던 지인의 것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 편지를 적었다는 사실에 한번, 그리고 그 편지의 내용에 한번 더 놀랐다. 이토록 차분하고 진중한 내용이라니. 기다란 편지라기보다는 하나의 엽서였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의 속에 그렇게 깊고 푸른 세계가 들어있을 줄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편지를 전하던 그의 손을 아직도 기억하고, 우리의 우정에 대해 고심했던 그 편지의 내용도 여전히 기억한다. 사실 나는 그와의 관계가 오래 갈 것이라고 여기지 못했지만, 그를 보는 나의 시선은 그 편지 이후로 급격히 다른 것이 되었고, 우리는 지금도 종종 안부를 전하며 지낸다.
편지를 쓰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미신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그 믿음의 반례는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이 믿음을 배신하는 사례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덕분에 나는 편지를 적는 것만큼이나 받는 것도 좋아한다. 마치 언젠가 지난 당신이 이야기했듯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우편함의 봉투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