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한 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아직도 고등학교 이야기를 할 때면, 전학가기 전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1학년만 생활했지만, 더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친하던 친구들이 같은 학교에 올라가면서 적응도 쉬웠고, 학생회 활동도 즐거웠다. 바른생활부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머리나 교복 단속을 할 때 친구들과 선배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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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도, 학생들도, 공부에 열정적이었다. 고2 한 반 학생이 모두 모의고사 외국어 영역이 1등급을 맞을 정도였고, 전교생 중에 4등급 이하인 학생이 한 명도 없었으니 웬만한 특목고가 부럽지 않은 학교였다. 선생님들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만 열심히 공부하면 인 서울대학, 적어도 국립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학교라는 자부심에 학교 다닐 맛이 났다.
하지만 생활은 1년을 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전학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집에 원하지 않는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고, 주말도 없이 전화해대는 사장님들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사업을 이끌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셨다. 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한 기업에 팔고, 대신 집과 직장을 얻었다. 그리고 1학년 겨울방학에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당연히 학교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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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은 리셋이다
전학을 간다는 건, 내가 일궈왔던 친구 관계가 한순간에 끊어진다는 걸 말한다. 사춘기 여고생에게는 성적만큼 중요한 게 친구 관계인데, 난 그 대단한 걸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했다. 그리고 여학생들만의 문화라고 말하긴 좀 거창하지만, 새 학년이 되면 서로 스캔을 한다. 서로 맞을 것 같아 보이면, 한 두 마디 건네보고, 크게 싫은 점이 없으면, 친구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 가고 수다 떨 친구, 밥 친구, 학원 같이 가는 친구, 소풍 때 버스에 같이 앉을 친구를 정해 간다. 난 전학생이고, 학년도 바뀌었다. 나의 모든 관계는 리셋되었다.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해야했다.
봄방학 직전에 전학을 가서 1학년 교실에서 한 3일 정도 지냈고, 2학년이 되었다. 2학년이 된 첫날. 교실을 둘러보며 스캔을 시작했다. 인상이 선해 보이는 아이가 눈에 뜨였고, 그 친구를 사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밥을 같이 먹자고 하자, 그 친구는 이미 같이 밥 먹는 친구가 3명이 더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무리에 끼게 되었다.
어디서 전학 왔는지, 어떤 학교였는 지 묻는 건 1분짜리 이야기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 였다. 낯선 그룹에서 나에게 관심을 바란 것도 문제이기도 했다. 어쨌든, 연예인 이야기가 수다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나는 거의 없는 사람 같았다.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듣는 나도,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이 아이들도 서로 불편해져 갔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2학년이 된 지, 2주일이 지났을까.
아이들은 나에게 급식실에 가자는 말없이 밥을 먹으러 갔다. 친구들이 깜빡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불안한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밥을 먹고 와서는 언제 나와 밥을 먹었었냐는 듯이 즐겁게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나에게 밥 먹자는 소리는 없었다. 이미 밥 친구 그룹이 결정된 상태에서, 나에게 굳이 밥 먹자고 할 친구들도 없었다.
여학생들은 친구의 선이 존재한다. 같이 학교 가는 친구, 교실에서 이야기하는 친구, 다른 반에 가서 책 빌릴 수 있는 친구, 밥 친구, 소풍 갈 때 버스에 옆자리 앉을 친구 말이다. 그중에서 밥 친구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학교생활에서 급식실에서 같이 가는 그룹이 없다면, 친구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군중 속의 고독. 몇십 명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지만, 나와 밥 먹을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슬펐고, 창피했고, 자존심도 상했고, 혼자 다닐 용기도 없었다.
그 뒤로, 학교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4교시 종이 울리면, 나는 그냥 엎드렸다. 5교시 종이 울리면 일어났다. 잠이 와서 그런 게 아니라,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집에 갈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집에서도 입맛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먹으려고 하면, 울컥했다. 바로 화장실 가서 숨죽여 울었다. 내가 학교 다니기가 힘들다는 걸 들키는 게 싫어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변했다. 먹은게 없는데도, 먹으면 토하기도 했다. 괜히 학교 생활은 어떻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까봐, 집 근처 독서실을 등록했다. 공부해야 한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대충 빵 하나를 챙겨, 독서실로 갔다. 공부가 잘 될 리 없었다. 공부하다, 울다, 멍 때리기를 반복하다, 저녁 식사시간을 조금 넘겨서 집에 들어와서는 쫓기듯 방으로 들어가 잤다.
그때 살이 빠졌다는 걸 알게 된 건, 신체검사 때였다. 초등학교 졸업 전에 50kg에 가까웠는데, 고2 때 체중이 50kg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 살이라도 빠졌네.
그때 유일하게 위안삼은 건, 조금은 날씬해진 나의 모습이었다.
살 빠진 게 위안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
나도 50kg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이 몸무게를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