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작하지 못한 숙제를 고민하며...
내 남편은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소설을 쓰면 잘 쓰겠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소설을 좀 배워볼까 싶어서 정윤작가님의 소설기초반에 들어가서 공부 중이다. 소설 쓰는 방법에 대해 하나씩 공부하다 보니 소설이라는 장르가 독자로서 읽을 때 하고 작가로서 쓸 때가 참 다르다. 재미있게 읽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나의 상상력과 관찰력에 실망하게 되고 넘지 못할 한계가 보인다.
나는 성격이 털털하고 산만한 편이라서 사물이나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않는다. 늘 대충대충 훑고 지나간다.
때로는 일부러, 때로는 나도 모르게 불편한 것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잘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고,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남편은 나와 달리 세심한 성격이라서 이런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잘 챙겨주고 설명해 준다.
남편은 참으로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사람들의 옷차림, 생김새 등을 자세히 기억한다. 오늘 걷던 길과 어제 걷던 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한다.
한 번은 둘이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정류장에서 어떤 현지인 아주머니가 버스를 탔다. 남편은 그 아주머니를 보더니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저 아주머니 어제도 이 버스 탔는데. 오늘은 검은색 옷을 입었네. 어제는 빨간색옷이었는데. 오늘은 또 어디 가시나. 일하러 가시나?"
아니, 도대체 어제 버스에 탄 사람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나는 황당한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갈길도 바쁜데 다른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길가에 뭐가 있는지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런 관찰력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늘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차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남편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쓰레기 분리수거장 옆에 새로 CCTV가 생겼다는 등, 주차장에 있는 차가 누구 차인데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는 등, 거기 걸어가는 사람은 몇 동에 사는 사람인데 매일 이 시간에 출근을 하는 것 같다는 등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한다.
그럼 나는 왜 경찰이나 탐정을 하지 그랬냐고 살짝 핀잔을 준다. 그 많은 것들을 기억하려면 얼마나 피곤할까 싶어서 물어보았다.
" 여보, 그거 다 기억하려면 힘들지 않아? 어떻게 다 기억해? "
" 내가 기억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보이는 거야. 그냥 보이고 기억이 나."
" 당신 천재 아냐?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
이런 능력이 놀랍긴 하지만 솔직히 남편이 천재는 아니다.
남편의 이런 성격이 결혼생활을 하면서 불편한 적도 많았다. 물론 남편도 나의 성격을 힘들어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런 남편의 성격이 무지하게 부럽다.
"여보, 당신은 소설 쓰면 잘 쓰겠는데~~. 소설가 했으면 잘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소설 한 번 써 볼까? ㅎㅎㅎ"
나도 남편처럼 그렇게 날카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었을까?
소설 비슷한 거라도 써 보려고 컴퓨터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머리가 허옇고 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어 눈까지 뿌해진다. 내 머릿속의 정보들은 그냥 단순한 기억의 조각이 되어 머리속을 날아다닌다. 이 조각들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표현할까 고민하는 사이 소중한 시간은 저만치 도망가 버린다. 그래도 쓰다 보면 뭔가 생각이 나겠지. 시간을 붙들게 되겠지.
오늘도 아직 시작하지 못한 숙제를 앞에 놓고 고민하며 이 글을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