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피아노를 위해
어디선가 낯익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윗집에서 들리는 소리인가 보다. 아주 훌륭한 수준은 아니지만, 제법 듣기 좋은 연주이다. 그 리듬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다 보니 문득 나의 피아노가 떠올랐다. 아니, 언니의 피아노라고 해야 하나.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는 치지 않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공립학교에 부임 한 언니가 월급을 받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산 피아노였다.
피아노도 칠 줄 모르는 언니가 갑자기 피아노를 사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좀 의아했었다. 평소에 지독할 정도로 알뜰한 편이고, 돈을 벌기 시작한 첫해라서 하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그 당시 월급의 절반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 피아노를 사겠다니.
우리 집에서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에 내 선물인가 싶어 내심 신나고 들떠 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에 부도가 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시내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신장로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시골 동네로 이사를 가야 했다.
철이 없던 나는 어려운 집안형편에도 불구하고 늘 해맑았다. 나는 우리가 가난해졌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몰랐다. 같은 반 친구가 피아노학원을 다니는 걸 보고 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다. 엄마는 나의 고집에 못 이겨 마지못해 허락을 하긴 했지만, 가끔 학원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피아노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할 줄 아는 건 책 읽는 것뿐이었던 나에게 할 일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는 이제 고등학교에 가려면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며, 학원을 그만두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피아노가 살짝 지루해진 참이라 흔쾌히 엄마말에 동의했다. 엄마의 의도가 진짜 공부 때문이었는지 음대에 보낼 형편이 아니어서 진작에 포기하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피아노와 인연을 끊었다.
그런 타이밍에 언니의 피아노 구입은 나름 기쁜 일이긴 했지만 뜬금없었다. 그렇게 피아노를 사놓고 언니는 시골로 발령이 나서 집을 떠나야 했다.
처음 피아노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딸깍거리는 메트로놈을 틀어놓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명곡들을 쳐주며 먼지조차 앉지 못하게 했다. 집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학력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고등학생이었기에 점점 피아노는 내 관심밖으로 밀려났고, 더 이상 환대를 받지 못한 채 방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피아노 위에 먼지가 쌓여가고 소리도 둔탁해질 무렵 언니는 결혼할 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결혼을 하면 피아노를 가져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나는 언니의 말에 내심 당황했다. 물론 그 피아노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언니의 표정이 너무 확고해 보여, 나는 왜 피아노를 가져가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이 피아노가 어쩌면 언니의 이루지 못한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한 번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거나 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은 딸이 셋이었지만, 큰 언니는 어려운 집안 사정을 고려해, 고등학교 때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가고 싶은 대학을 포기하고 지방 사범대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 가는 것이 꿈이었노라고 말하곤 했었다. 피아노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언니는 결국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했다. 결혼하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두 집 살림을 해야 했고 아이들은 친정엄마가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언니의 피아노는 다시 친정집에 남겨졌다.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내 방을 정리하면서 피아노를 가져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었지만 왠지 그냥 친정집에 그냥 놓고 와야 할 것만 같았다.
세월이 지나 피아노도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좋은 소리를 내지 못했고, 언니도 결국 피아노를 가져가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친정집 내 방에 방치되고 있었다.
언니는 이제 피아노 대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배우러 다닌다. 책도 쓰고, 여행도 다니고 예쁜 공예품들도 만들며 즐겁게 살고 있다.
그 시절의 피아노는 더 이상 언니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언니의 또 다른 피아노를 찾은 걸까. 나는 언니가 새로운 피아노를 찾아 더없이 감미롭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가며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