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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Opinion 수필

양할아버지

풀을 닮은

by S 재학

5도 2촌을 한다. 현대인의 로망 중 하나라는 것을 하고 있다. 내일을 모른다더니, 두드려라 열리리라더니, 사람 일 모른다. 우연히, 정말 생각지 못한 땅이 생겼다. 물론 내 땅은 아니다. 농사지을 땅, 무언가를 가꿀 수 있는 땅 말이다.


5년을 묵혀놨는데… 할 수 있겠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지난 2월이다. 허락이 떨어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토요일을 기다려 새벽부터 달려갔다. 차 없는 서울 외곽을 달리는 기분도 좋았고, 안개 속에 솟아 있는 도봉산 바위를 보는 것도 좋았다. 사패산 터널을 지나 곧바로 오른쪽으로 꺽어들면 한때 유명했던 서울 북쪽 ○○유원지 표지판도 아련했다.


2차선 국도 옆 여덟 가구. 첫날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방문이 시작되었다.

상추, 고추만 조금 심을 거예요.

모종 파는 곳을 가서 마음이 싹 바뀌었다.

방울토마토, 아삭이 고추, 매운 고추, 가지, 상추, 고구마, 홍당무, 옥수수, 대추나무 두 그루, 호박, 오이… .


양할아버지가 쇠스랑, 검정비닐, 비료, 끈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땅을 갈아엎고 뒤집고, 고르고 퇴비 뿌리고, 굼벵이 없애는 약, 흙 소독하는 약, 복합비료. 듣도 보도 못한 재료들이 줄줄이 뿌려지고, 농사의 절반은 양할아버지가 지으시고, 그곳을 갔다 오면 사흘은 앓아누워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할아버지 안 계실 만한 때를 골라 가는데도 어김없이 나타나 일을 시키는(?) 바람에 약간의 겁을 먹고 가곤 했다.


보라색 옥수수의 달콤함, 고추장, 꿀 버무려 만든 양념장에 찍어 먹는 고추의 풋풋함. 가지….

그동안의 노고가 이렇게 보상이 되는구나.


특히 양할아버지랑 친해졌다.

잡초 우거진 울타리에 제초제도 뿌려 놓고 가시는 것 알고 있다.

할아버지 점심 먹으러 가요.

조반을 늦게 먹었는데 하시며 따라나선다.

할머니는 평생 해 오는 일이 있어 이웃 고장에 사시고, 자식들은 인근 도시에 산단다.


할아버지를 보면 풀잎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상에 앉아 마을 앞산을 바라보는 눈 속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 보인다. 쇠스랑으로 땅을 고를 때면 어느 장인이 저럴까 싶다.


풀은 잠을 안 자는 거야.

고구마는 서리가 낼모레 올 것 같으면 캐야 해. 환갑 넘어면 늦어.


지난 토요일엔 가을배추, 무를 심으러 갔다. 일의 대부분은 양할아버지가 하셨다.

할아버지 점심 먹으러 가요.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울타리 넘어 텃밭에 양할아버지 작품이 보인다.

풀잎 같은 할아버지가 풀잎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쥐어짜셨을지 짐작이 간다.


양주 팻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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