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수
창문 너머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기질에 대해 생각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약한 아이가 주어진 기회를 야무지게 활용할 때, 피구 경기에서 공을 독차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야 그만 해.’라는 친구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해 내고야 마는 아이. 분명 자신의 차례인데 뒤에 서 있는 (기질 센) 친구의 우격다짐에 양보를 하는 아이. 여러 사람 앞에 서느니 차라리 감점을 택하는 아이.
저 기질이 바르게 나아가야 하는데.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더 큰, 사회와 국가 공동체, 인류 행복에 관심을 갖게 해야 하는데.
도망치듯 나온 춘호네 집에서 10여 분 내려오니 널따란 바위가 펼쳐진 계곡이 나왔다. 화양계곡이라고 했다. 모래밭을 따라 텐트도 보이고 바위 옆 평상에서 수박을 옆에 놓고 화투 치는 모습도 보였다. 모래밭에 쳐 놓은 텐트 사이를 호기심 가득한 불량스러운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계곡 아래 민박집 조그만 방에서 잤다. 민박도 춘호가 해결했다. 대단한 친구다. 꼬르륵거리는 배는 마당 옆 우물로 채줬어도 이 동네에서 얼마나 화려한 시절을 보냈는지 밤새 떠들다 잠이 들었다.
‘사람은 배운 대로 풀어 먹고 산다.’
어머니가 입에 자주 담으시는 말이다. 어렸을 때 기수는 밭일 가는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할 때면 어머니는 기수를 상대로 말씀하셨다. 어쩌면 고단한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흙을 향하여, 호미에게 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기수는 어머니 말씀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았다.
‘어쨌든 배워야 한다.’
그 배움을 갖으러 서울로 왔건만 지금 첩첩산중 계곡 민박집에 뒹굴고 있다. 한 마을이 서너 집으로 이루어진, 오후 3시면 집 앞에 솟아 있는 산 너머로 해가 져 벌써 어둑해지는 산속에 있다. 친구들이 허름한 민박집 작은방에서 쪼그려 잠이 들면 계곡으로 갔다. 텐트 앞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보이고, 작은 전축이 부서져라 지르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대는 더벅머리도, 무엇보다 발걸음을 잡는 것은 가족의 모습이었다. 웃는 얼굴,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아이의 입을 손으로 닦아주며 미소 짓는 모습이 좋았다. 눈물이 흐를까 봐 하늘의 달을 쳐다보다 저절로 엄마라는 소리가 나왔다. 하염없이 계곡을 오르내리다 달빛도 차가워진 때에 맞춰 민박으로 돌아오면 땟국물로 얼룩진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친구들의 등허리가 하얗게 보였다. 기수도 귀퉁이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여름이라고 하지만 아직 봄옷 그대로인 그들은 갈수록 허름해져 갔다. 겉모습보다 주린 배가 더 문제였다. 춘호의 능력도, 능력보다 계획도 바닥났다. 궁리 끝에 춘호가 계획을 세웠나 보다. 사장이 자신들을 버린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맞닥뜨리는 순간이 더 비참할 것 같아 애써 외면했던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기에서 학습지를 개척하자. 그것이 춘호의 계획이었다.
‘배운대로 풀어 먹는구나.’
다음날부터 기수와 친구들은 학습지가 든 가방을 메고 산골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학습지라고 해봐야 날짜가 한참이나 지난, 기수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이 전부다. 서너 집이 마을인 산골에 학습지를 볼 학생이 얼마나 있을까? 설령 신청한다 해도 배달해 줄지에 대한 대책도 없다.
사실은 춘호와 대근이 싸움을 한 것이다. 그날도 계곡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때까지 걷다 돌아오니 두 친구 표정이 달랐다. 대근이 눈두덩이 퍼렇고, 춘호는 입술이 터져 있었다. 주먹이 오고 간 것이다. 샌님 대근이 춘호에게 덤빌 정도면 더 이상 머무르면 안 된다.
두 번째 학습지 개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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