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끄트머리

33. 기수

by 재학

오늘의 나는 내 기억의 산물이다. 기억하려 노력해서 기억된 것과 잊으려 몸부림쳐 기억에서 사라진 것 모두 나를 만들었다. 그중에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기억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실패한 일, 아픈 경험은 특별히 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특정 상황을 못 견뎌 하고 도망가려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이를테면 혼자 남겨지는 상황을 힘들어하는 것이라든가, 평가에 과도한 방어적 기재를 작동하는 것 등. 대부분 그렇지 않나? 대부분 술술 풀린 일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나?


화전민 집 뒤란의 금발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예상치 못한 상황은 감각을 멈추게 만드나 보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도 아이들 재잘거림도 들어오지 않았다. 발걸음도 멈추었다. 소녀에게서, 정확히는 소녀의 머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이가 돌아섰다. 넘겨 빗은 머릿결이 허리를 따라 물결을 만들었다. 열 살이나 열한 살 정도 되었을 것 같다. 하얗고 작은 얼굴의 검은 눈동자가 기수 너머 먼 산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녀의 모습이 어디까지 이국적이었는지 판단이 안 섰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여 여자아이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치마 아래 다리가 길었다. 금빛 물결이 허리 아래에서 춤췄다. 낮은 지붕 속으로 사라진 금발의 잔영이 길게 남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몇 개의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걸어서 문경 버스터미널에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다 서울행 버스를 탔다. 어디서부터였는지 대근은 신발 한 쪽으로 다녔다. 학습지가 사라진 기수의 가방은 가벼웠다. 본래대로 영어와 수학 사전, 중학교 체육복 바지만 남았다. 서울에 돌아가도 학습지 사무실은 가지 않을 것이다. 가는 내내 춘호는 말이 없었다.

셋은 그렇게 헤어졌다. 버스에서 내리고 어떤 표정으로 헤어졌는지, 무슨 말을 하며 돌아섰는지 기억은 없다. 그냥 각자의 길을 갔을 것이다. 춘호, 대근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헤어질 줄은 몰랐다.

기수에게 10대는 꿈과 희망, 절망에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허덕이면서 치열하게 살아냈던 시기다. 회상만으로도 가슴을 적시는 시절이 있다. 아름다움이 많이 남는 시간을 지나왔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픔이 많은 나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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