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저지르는 불법

40. 기수

by 재학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르는 불법이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학교 앞 30km 구간에서 대형 버스 뒤를 살금살금 따라가다 신호를 어겼다. 딜레마 존에 들어서니 이미 빨간불이다. 잠깐 버스 탓을 했다. 저게 좀 빨리 가거나 멈추지. 아냐, 바짝 따라간 내 잘못이야. 아까운 돈. 이 돈이면 두 달 기름값인데(내 차는 연비가 좋다. 6만 원이면 한 달 900km를 탄다)

한때, 법 공부할 때, Legal Mind를 새기고 다녔다.

이 말은 법적인 문제상황을 해결할 때 갖춰야 할 일정한 체계나 원리를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과 관련된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에 관련된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당신은 리걸 마인드를 가진 것이다.’ (토머스 리퍼 파월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자타가 공인하는 물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 말을 되뇌며 이성적인 판단을 위해 매우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은 천성을 이기지 못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들이 분양가의 세 배가 넘게 파는 것을 보고 서둘렀을 것이다. 등기부등본을 좀 더 따졌어야 했다. 복덕방의 감언이설과 내 집이 생긴다는 마법에 리걸 마인드를 발휘하지 못했다.

미등기 전매. 지금도 이런 불법‧탈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아마 있을 거다) 미등기로 오랜 세월 전매한 아파트였다. 최초 분양자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거쳐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복덕방 말로는 그게 정상이란다. 굳이 등기를 해서 돈을 들이냐는 것이다. 그런 줄 알았다. 그게 정상인 줄 알았다.

아파트를 사고 3개월 정도 좋았다. 5층에서 밀어 넣은 연탄재가 통로를 타고 1층까지 떨어지는 아파트였지만, 손바닥만 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였지만 내 집이라서 좋았다. 아파트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시골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우리 기수가 수원에 아파트를 샀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셔서 시샘과 부러움이 가득했단다.

‘벌써? 몇 평이래?’

‘크데.’

‘술 한잔 사.’

‘사고 말고’

마을 회관에 막걸리 두 통을 냈다나….

어서 빨리 퇴근하고 싶어 5분마다 시계를 쳐다보고, 5시 땡하면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단지 앞 논둑까지 산책을 했다.(그 논이 몇 년 뒤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로 변했다)

어느날인가 아파트 앞에 현수막이 붙기 시작했다.

‘주택 공사는 책임져라.’

‘실수요자에게 책임전가 웬 말이냐?’


미등기 아파트를 정리한다고 했다. 뜬금없는 서울 성동 세무서에서 고지서가 날아왔다. 복덕방은 도움이 안되었다. 법무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렵게 찾은 원매자도 날벼락이지. 분양받아 판 것이 언젠데 이제 와서 등기를 해 주라니.

결국 법원으로 갔고 신혼의 부부는 밤마다 벌벌 떨며 자는 나날이 이어지다 어찌어찌 원매자와 합의가 되어 고지한 세금을 반반씩 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먼 훗날 학을 떼고 팔고 나온 후 5층 주공이 20층 단지로 바뀌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짐작이다), 오래된 주공아파트를 재건축하기 위해, 걸림돌을 해결하기 위해 몇 푼의 이익을 남기고자 발버둥 치는 서민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지 않았을까. 조금 있으면 지들끼리 문제를 해결한다. 걸림돌이 저절로 해결된다. 중간에 이익 본 사람과 이익 볼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런 거대한 계획이 가동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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