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가을이면

가을은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by 구우

어제 오늘은 제법 가을이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이라던가 '청명한' 같은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가을 말이다. 그저께와 그끄저께는 가을이 아니었나 하면, 그저께와 그끄저께를 포함한 지난 10월은 흡사 장마철이었다. 비가 올 수도 있지. 날이 흐릴 수도 있지. 근데 그게 매일이다시피 하니 아침이면 하늘을 쳐다보는 게 일이었다. 빨래를 베란다에 널어야 할 지 방에 널어 제습기를 켜야 할 지 결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유난한 비 오는 날씨보다 그간의 10월이 몸에 익은 바, 나는 우리집 가족 한 명이랑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가기로 몇 주 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노고단은 아주 예전에 자동차로 한 번 가 본것이 전부인데, 이번에 노고단에 가려고 검색을 해 보니 예전에 내가 간 곳은 성삼재 대피소였는지 아님 그만치도 못 갔는지 아무튼 등산한다고 애를 쓴 기억은 없고 차만 주구장창 탔더니 높은 곳이었더라 하는 기억만 남아 있었다.



노고단을 포함하여 지리산은 두 번을 가 봤는데, 다른 한 번은 무려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한 천왕봉 등반이었다. 지금 옆에서 코 골고 자고 있는 전 남친과 함께 말이다. 나는 인생을 보람차게 살지 못했으나 위로 3대가 덕을 쌓아 주셔서 정상 다 와 가서 일출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몹시 매우 굉장히 춥고 힘이 들었던 기억도. 다녀와서 며칠을 온 몸이 고장나서 구식 로봇마냥 삐걱댔던 기억도.



그깟 비가 뿌려대도 가을인 바, 나는 이 계절을 놓치고 싶지 않아 우리집 가족 한 명을 먹을 걸로 꼬셔서 원래는 어제 날짜로 노고단을 올라가기로 했었다. 2년 전 등반했던 한라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것 보아라 자동차로 1200미터까지 올라가고 정상은 1500미터이다. 그럼 300미터만 올라가는 거야? 이것 보아라.. 그건 높이잖니.. 아무튼! 한라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노고단 정상까지 1시간 반을 걷는데 심지어 1시간은 거의 평지라지 않느냐. 소고기 사줄거야? 소고기 뿐이겠니.



내 사리사욕에 우리집 작은 어린이가 희생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소고기 뿐이겠는가 헨젤과 그레텔이 빵 부스러기는 날아가 버렸지만 뿌려놓은 돌멩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나는 네게 백 미터 이 백미터마다 초콜릿과 젤리를 쉴 새 없이 줄 계획까지 세웠었는데.



성삼재 주차장에 주차하고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궁금한 건 주차공간이 넉넉한가 하는 것뿐이었다. 혹시나 하고 검색을 해 보았는데 노고단은 국립공원이기에 가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뭐라고? 나는 정말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서 컴퓨터를 켰다. 최근 나는 공연이나 전시 등의 행사 정보를 접하면,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라는 걸 너무 많이 경험했다. 심지어 예매 시작 시간에 들어가도 눈 앞에서 매진을 당할(?)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불안함을 느끼며 컴퓨터를 켰던 것이다.



정보를 하나 알려주고 싶다. 아무도 안 궁금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1870명은 궁금할 지도 모른다. 이것 보라지 나는 숫자도 외웠다. 노고단에 하루 입장 가능한 탐방객 수는 1870명이다. 나는 토요일에 노고단에 가려고 했고, 깜짝 놀라 컴퓨터를 켠 것은 금요일이었다. 토요일, 일요일, 그 다음주 토요일까지 각각 1870명이 노고단에 가려고 이미 예약을 해 놓은 것을 나는 보고야 말았고,



지금 생각하면, 그러니까 결국 못 갔고, 충격과 허탈함이 사라진 지금에야 언제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금요일 그 1870명에 못 들어간 걸 확인한 그 순간에는 마치 내가 온 인생을 이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좌절감이 컸다. 왜 나는 이걸 진작 확인해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길 기대하는(소고기도 먹기를 기대하는) 우리 아이가 실제로 실망도 크게 했다. 그 순간에는, 미리 알아보지 못한 내 탓과, 산에 가는 것도 예약을, 그것도 일찍 해야만 한다는 이 더러운 세상탓을 했다. 조금 진정하고 나서는, 그래도 지금 안 것이 얼마나 다행이야 세 시간이나 운전해 갔는데 입뺀(출입을 거절당하다-인터넷에서 보고 배움)당했으면 그건 또 얼마나 황당했겠어 하는 장원영식 럭키비키적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제 오늘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어제 한 빨래는 오늘 잘 말라 있었다. 집 안에 있으면 조금 쌀쌀한가 했지만 앞 뒤 베란다 문을 열어놓고 내내 환기도 시켰다. 어제는 노고단에 있어야 할 우리 집 작은 아이와 노고단에서 먹으려고 했던 주먹밥과 라면으로 점심 식사도 하고 등산길 대신 가을 느낌 물씬 나는 산책길도 오래 걷고 소고기는 아니지만 식당 가서 삼겹살에 밀면도 야무지게 챙겨 먹고 코인노래방 가서 각방 잡고 한 시간씩 신나게 노래도 불렀다.(큰 청소년과 전 남친은 내내 일정이 있어 집을 비운 상태였다) 오늘도 세탁기 돌리고 집에서 커피도 마시고 한 번씩 베란다 밖을 쳐다보고 아이고 가을이네, 하고 말했다. 그래, 어디서든 가을이면 됐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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