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현, 나예 작가의 그릇 덕질 이야기, 그리고 인생 이야기.
내가좋아하는것들그릇
길정현 지음
스토리닷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참 좁은 세상 속에 살았고
안전제일주의였기에 모험을 즐길 수 없었다.
나의 과거가 불행하진 않았지만,
‘나’를 제대로 탐색하고
‘나’를 제대로 드러내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무언가에 푹 빠짐’ 또는 ‘한 가지에 미쳐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아쉬움이다.
그 흔한 덕질을 해본 적이 없다.
사실 그 이유가 꼭 나의 열정의 부재라기보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스킵하고.
언니가 좋아하니까 따라서 Ref 이성욱을 좋아했다. 뜨뜻미지근하게.
젝키 아니면 HOT를 좋아해야만 했던 십 대의 나는
친구가 좋아해서 HOT를 좋아했고
딱히 확 좋은 오빠가 없었는데 괜히 장우혁을 골라 좋아했다.
좋아하는 척했다고 해야 할지도..
친구 따라 강남은 간다는데 나는 친구 따라 강타네 집 앞에도 가봤다.
한 가지에 미쳐본, 그래서 그것에 관해 준박사쯤 되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그릇』의 저자 길정현, 나예 작가는 다양한 분야에 미친 경험이 있는 분이다. 그릇에 미친(어감이 과격하지만, 너무 적절한 표현이라) 그는 그릇장 안에 있는 그릇을 하나하나 꺼내서 썰을 풀자면 며칠 밤도 새울 만큼 그릇에 얽힌 에피소드 부자다. 예쁜 그릇들도 탐이 났지만, 글을 쓰고 싶은 나는 그 에피소드들이 더욱 탐났다.
『물론 그릇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내 주위만 봐도 그릇장이 아예 없다는 집도 있고, 워낙에 잘 깨트리다 보니 그때그때 적당히 사서 아무렇게나 쓴다는 집도 있다.』 _103
내가 아마도 그런 사람에 속하지 싶다.
나도 물론 예쁜 그릇을 좋아한다. 여행지나 기념품숍에서도 그릇 코너에 유독 오래 머물지만 구매로 이어지진 않는다. 꼭 필요한 것만 사자는 내 신조 탓이기도, 주머니 사정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일종의 대리만족이 되기도 했던 거 같다.
생소한 그릇의 이름들이 나와 살짝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책 앞에 수록된 사진들을 보면 아하! 이 그릇 이름이 이거였구나 하게 된다. 혹시 사진이 첨부되지 않은 그릇은 설명을 들으며 유추해 보는 재미도 있다. 마음껏 머릿속으로 그려본 뒤 초록창에 검색한다. 짠~하고 떠오르는 이미지와 내가 상상한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면 괜히 신이 난다. 덕분에 그릇 구경을 하며 눌러놨던 물욕이 참았던 방귀 새어 나오듯 스멀스멀 올라와 참느라 힘들었다. 방귀 참기만큼.
그릇을 중고로 그것도 해외 배송으로 사고파는지 처음 알았다. 거기다 부르는 게 값인 경우도 있고. 좋은 그릇을 잘 세척하고 보관하는 방법은 꽤나 까다롭다는 점도 놀라웠다. 우리 아들이 기타에게 좋은 습도를 맞추려고 가습기를 틀었다가 제습기를 틀어대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뭐든 소중한 걸 잘 간직하는 일은 애정 없이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부지런한 사람이 덕후도 되는 거라고.
흥미로운 그릇 이야기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나예 작가의 이야기도 마음에 남는다. 왜 다른 할머니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 않는지 의아했을, 그리고 서운했을 어린 ‘정현’이 안쓰럽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는 그 헛헛한 마음을 할머니의 손길로 가만히 쓸어주고 싶기도 하다. 잘 안 먹는 아이에 대해 멋모르고 보태는 조언과 충고들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그 젖병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심정도 너무 알겠다는.
이 책 덕분에 내가 전혀 몰랐던 ‘그릇의 세계’에 입문하고 이제 ‘그릇알못’을 탈출해 ‘그릇쫌알’로 가는 과정에 놓이게 되어 고맙다. 그리고 내게 위로가 되는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었기에 또 고맙다.
「나는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것이 최소한 한 가지는 있어야 그것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묻는다면 사람은 위로로 산다고 하겠다. 물론 무엇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지는 나 스스로 찾아야 한다.」 _190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 난 이미 찾았다.
하지만 위로가 여러 개면 좋을 테니 더 찾아봐야지.